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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ug 08. 2023

봄동의 웃음소리

100가지요리, 100개의 마음. 첫 번째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1일 차

이름만으로도 계절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봄동은 이름조차 봄이 들어간다. 어렸을 때에는 봄동이라는 걸 몰랐다. 아마도 어머니가 해주셨을 테지만 그때의 난 배추와 상추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봄동은 된장국을 끓이거나 겉절이를 만들어 먹는다. 봄동 겉절이는 아삭아삭하고 봄동된장국은 다른 배춧국보다 고소하다. 봄동을 먹으면 드디어 봄이 오는구나 하고 안심을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봄동을 잘 다루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봄동으로 요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봄동을 엄청 많이 산 누군가 아는 사람이 된장국을 끓여서 냄비째 준다거나 겉절이를 해서 먹어보라고 빨간 플라스틱 박스에 담아주면 먹곤 했다. 봄동요리를 받으면 바로 봄이 느껴졌다. 드디어 긴 겨울이 끝나는 것이다.


난 겨울을 싫어한다. 심한 경우(최근 십 몇년 동안)에는 매일 마음을 다루는 병원에 다녀야 했다. 눈이 오면 좋다고 눈싸움을 하거나 눈썰매를 탔었는데 어느덧 겨울이 오면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심각한 우울증이 오는 나이가 되었다.하루에도 몇 번씩 창문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겨울들이었다. 많은 연습과 정기적으로 먹는 약들 덕분에 이제는 무색무취한 정도로 바뀌었다. 그나마 얻은 것은 마음의 병도 병이라는 것과 의사선생님을 주기적으로 만나면 나아진다는 깨달음이었이다. 그래도 겨울은 여전히 회색의 계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결국 봄은 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지독한 겨울도 봄을 이기지 못한다. 안달복달해도, 느긋하게 기다려도 봄은 제 속도로 다가온다. 그걸 알게 된 후로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생각만큼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봄이 오길 기다리고 항상 그 징후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 징후는 냄새로 가장 먼저 내게 찾아본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녹으면서 축축한 냄새가 찾아오면 이제 겨울이 끝났겠구나 생각한다. 엄밀히 말해 그건 봄의 냄새라기보다는 여름의 냄새에 가깝다. 습하고 더운 나라의 오래된 호텔에 깔려 있는 카펫과 수건들이 덜 말라서 나는 곰팡이 냄새 비슷한 축축한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 한 여름의 습기로 가득한 동남아 호텔에서 있었던 무더운 날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겨울 여행을 떠났다가도 정리가 덜 된 호텔등에서 그 냄새가 나면 난 한 참을 그곳에 서있곤 한다. 하지만 그 냄새는 여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 봄이 왔음을 얘기하진 않는다. 꽃이 피고 사람들 옷차림이 바뀌고 모든 TV광고가 봄이 오고 있음을 얘기해도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예전에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 사람이 된장국을 많이 끓였다고 먹어보라고 큰 냄비에 담아왔었다. 이게 뭐냐고 하니 웃으면서 봄동이라고 했다.

"봄동 몰라?"

"응 몰라"

하면서 웃던 그날,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올해는 겨울이 유난히도 길고 추운 것 같았다. 몇 년째 어쩌면 몇십년째 아무도 내게 봄동을 주지 않았다. 정 떨어지는 내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봄은 오는 것 같은데 겨울이 끝나질 않는다. 지난주부터 거리에 흙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난 안절부절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봄이 오는 것을 알지만 결국 난 봄동을 사러 갔다. 퇴근 후 들린 작은 집 앞 슈퍼에 다행히 봄동은 있었다. 봄동이라 생각해서 배추같이 포기로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손질되어 비닐봉지에 패키지 되어 바로 요리하기 좋게 판매하고 있었다. 가장 작은 봉투에 담긴 봄동을 샀다.


생각해 보니 처음으로 살아있는 봄동을 본다. 매번 요리가 된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봄동을 봉지에서 꺼내 흐르는 물에 씻는다. 손질할 때의 살짝 흙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착각인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채반에 올려 물기가 빠지는 동안 밥을 한다. 쌀을 씻을 때 쌀뜨물을 받아 놓고 전기밥솥의 취사버튼을 누른다. 쌀뜨물을 냄비에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된장을 풀어준다. 물이 끓어오르면 마늘 한수푼과 봄동을 푸짐하게 넣어준다.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고 있다. 어느새 다 된 밥을  밥그릇에 담고 뜨거운 봄동된장국을 작은 국그릇에 퍼담아 가지고 테이블로 온다.


한 모금 먹었는데 예전에 먹은 맛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뜨겁고 고소하고 조금은 시원한 그냥 배춧국 같은 맛이다. 이맛이 아닌가 하며 갸우뚱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없는 집안은 겨울처럼 회색으로 가득한데 머릿속 아주 깊은 곳에서 작은 빛이 깜빡거릴 때마다 집안은 컬러가 되고 다시 흑백이 된다.


지독한 겨울을 떠나보내는 건 봄동이 아니라 그 냄비를 전해주던 그 사람의 웃음이었다. 이제는 잊어 희미한 윤곽뿐인 그 사람이 아직도 나의 겨울을 떠나보내준다. 봄동을 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 떠다니는 작은 불빛들이 컴컴한 집안에 조금씩 색을 입히고 있다. 드디어 봄이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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