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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Mar 17. 2024

바나나의 풍요로움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예순일곱 번째

그런 마음으로 과일을 사러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상가에 갔다. 슈퍼마켓 건너편 조그만 상가에 청년들이 한다는 과일 가게가 생겼다. 젊은 남자 둘이서 새벽부터 과일 바구니를 가게 앞에 내어 놓고 장사를 한다. 뭔가 트렌디한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여 과일을 산다. 청년이란 이름을 붙인 가게치고 제대로 된 걸 본 적이 없는 나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귀도 얇고 눈도 얇고 유혹에도 약한 나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가게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젊은 아주머니들과 이제 퇴근한 남자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귤, 사과, 망고, 바나나, 딸기… 지금 제철 과일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있어 그 과일을 먹으면 아 이제 봄이구나 아니면 아 이제 가을이구나, 이제 겨울이구나 그렇게 느끼곤 했는데 지금은 사시사철 과일들이 나오니 계절에 맞는 과일이 뭔지 잊어버렸다.


제철 과일을 맞는 시기에 먹어야 맛있다는 나의 신념은 딸기를 외면하고 귤을 건너뛰고 사과를 무시했다. 결국 제철을 알 수 없는 바나나 한 다발을 들고 집에 오게 되었다.


바나나 한 다발, 열두 송이에 10,000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어렸을 때는 바나나가 왜 그렇게 비쌌을까. 처음 먹은 바나나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그냥 바나나맛 우유가 바나나맛이 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다만 어느 날 밤인지 아버지가 바나나가 스무송이 정도 달린 커다란 바나나 한 다발을 사 왔던 기억은 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먹었는지 무슨 맛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어른이 되어서 먹은 바나나는 달달했지만 약간은 텁텁해서 내 취향의 과일은 아니었다. 내 취향과는 다르게 바나나는 아이스크림 위에 올려져 있기도 하고 팥빙수 위에 놓여 있기도 하고 얼려서 디저트로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주변에 바나나들이 많아지고 흔해졌다.


선물로 받을 일도 없고 내가 살 일도 없던 바나나. 생각해 보니 먹어 본 지 너무 오래 지나 지난 옛날이었다.


누군가 예전에 바나나는 노란 것보다 약간 검은 반점이 있는 게 맛있다고 했다. 그 기억은 누구의 말이었을까? 어쨌든 그 사람은 잊혀지고 그 말만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약간은 거뭇거뭇한 바나나를 한송이 사게 되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바나나를 보니 검은색 점들이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얼굴에 피는 검버섯처럼 보였다. 하지만 달콤한 향이 났다


저녁은 하기 싫고 하지만 뭔가를 먹어야 하는 했다. 바나나 하나를 까서 보았다. 검은색 반점이 있는 겉보기와는 달리 완전히 하얀 바나나가 속살을 드러낸다. 바나나는 하얀색이었구나 왜 지금까지 바나나는 속도 노랗다고 생각했을까.


한 입 먹어보니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져 나왔다. 기억보다 텁텁하지도 않았다. 이렇게나 단 과일이었구나.


집 안에도 바나나 향이 가득했다. 바나나 우유 향인가? 바나나를 두 개를 까먹으니 밥을 먹은 것처럼 배가 불렀다. 그때 검은색 반점이 된 바나나를 사라고 한 사람은 누군지 기억이 났다. 가끔 나를 위해 꽃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끔 바나나 같은 과일도 사 갖고 왔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쓸 모 없는 것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 시들어 버리는 꽃이라던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바나나라던가, 이상한 향이 나는 초라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남아 과일 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들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반드시 필요해서 쌀을 사고 꼭 필요해서 반찬을 사고 물을 사고 그런 것들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부수적인 것들이다. 꼭 필요한 것들은 인생을 살아 가게 하는 것이지 그 삶을 풍부하게 만들지 않는다. 지나서 돌아보니 나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선물해 준 그 사람들이 더 자주 기억이 난다. 나한테 쌀 한 포대를 선물해 준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풍성해져야겠다. 살아가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꼭 필요하지 않지만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래야 앙상한 마른 나뭇가지 같은 나의 삶에 잎이 나오고 꽃봉오리가 맺어져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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