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May 07. 2020

타인의 '불행'에 기댄 나의 '행복'이라니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역설(逆說)

아프리카의 기아에 기댄 우리의 배부름


어린 시절, 밥을 남긴 어린이들에게 종종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지금 아프리카에는 빵 한 쪽을 못 먹어서 굶어죽는 아이들이 태반인데,
너희들이 이렇게 남겨서야 되겠니?


맞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다 각도로 생각하니 마음 한 켠 불편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그냥 거기에서 태어난 죄로 헐벗음과 기아의 상황에 놓여 있는데, 그들의 불행은 어쩌면 우리에게 한낱 ‘밥을 남기면 안된다는 교훈’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 아닌지 하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출처: 로이터 통신



저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이 불편한 가설은 삶을 이어갈수록 점점 힘을 얻어갔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을 보며 자신의 불행을 인지하는 반면,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인의 행복을 보며 함께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막연한 불편함 속에 살던 나는 결국 그 불편함이 내 깊숙한 내면에 대한 자책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슬퍼하면서도 나의 내면 한 곳에서는 그 불행이 나에게 닥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감사는 선일까 악일까. 옛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저 죄인'들과 같이 않음을 인해서 시장통에서 감사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나의 행복과 감사도 그러한 종류의 것은 아닐까. 이렇듯 나의 불편함은 점점 더 힘을 얻어갔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저 죄인'들과 같이 않음을 인해서 시장통에서 감사했다고 하는데, 나의 행복과 감사도 그러한 종류의 것은 아닐까.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역설(逆說)


누구보다도 삶에 대해 열정적이던 H의 죽음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눈물도 나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야 알았다. 매일 같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한순간에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니 현실 같지 않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건강이 최우선이야.
다 좋지만 건강부터 챙겨야 해.


한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남겨진 사람들은 건강의 교훈을 논했다. 그는 죽음의 잠재적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서 떠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H의 죽음은 왜 우리에게 그저 ‘건강 캠페인’으로 남아야만 했을까. 왜 누군가의 죽음을 직면하면서도 우리는 온전히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위한 교훈을 얻고, 더 나아가서 우리들만의 행복을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마는 것일까.


아이가 자폐를 앓고 있는 A는 사회 전면에 나오기가 쉽지 않다. 보다 당당하게 사회에 맞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폐인 아이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자신의 아이에게 그와 같은 불행이 닥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긍휼의 시선으로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다른 부모들의 시선은 어쩌면 표면적인 능욕보다 더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영화 '증인' 스틸 컷


코로나 바이러스로 하루에도 수백명씩 사망자가 나오는 나라를 보며 우리는 스스로 선진국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 그런 식으로 방역에 실패한 나라가 나오지 않았다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부심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똑같은 결과를 놓고서도 타국(他國)의 상황에 따라 지금쯤 정부에 책임을 물으며 레임덕이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도 빠르게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는 나라들을 바라보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건강하지 못한 행복’일 수 있겠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 교훈을 논하지 말자


물론 불행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 불행과 실패가 타인의 것일 경우, 나에게 다가올 비슷한 불행과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 든든히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은 오히려 지혜로운 일이다. 다만, 당하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 교훈만 취해서 가는 것은 그 불행을 더욱 키우는 일이 되곤 한다. 심지어 타인의 불행이 상대적으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되고 있다면, 우리의 행복은 한낱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기생충’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행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누리 살고 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점검해보아야할  일이다. 혹시나 그렇다면 이제 그 행복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행복이 유지되려면 나보다 불행한 누군가가 늘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를 늘 옆에 두어야만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긍휼과 연민의 페르소나를 쓰고 있지만 마음 속에는 사람들의 위계 질서가 세분화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 위계 속에 스스로의 입지를 확인하는 것이 행복을 세는 방법이 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아프리카의 헐벗은 아이들에게는 혀를 끌끌차며 자신의 눈 앞의 음식들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갑작스레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건강을 조심해야겠다고 되뇌이는 사람들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아픈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의 강함을 감사하는 부모들은 그 아이와 부모를 두 번 아프게 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민족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불행들은 지식이 많다고 해서, 조심한다고 해서, 경각심을 갖는다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불행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왜 그들은 누군가의 ‘감사 제목’이 되어야 할까.


행복과 유사 행복, 감별의 시간


타인의 불행으로 인해 감사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불행은 예상치 못하게 닥칠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 닥친 일이라고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는 불행을 통과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의 근거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타인의 행복 역시 나의 불행의 근거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누군가의 불행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행복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당신은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진짜 행복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불행에 기대어 있는 행복인가?

출처: '꽃들에게 희망을' by Trina Paulu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