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자리

어색한 옷이 맞춤복이 되기까지

by 이음

<그가 나를 ‘아빠’라고 불렀을 때>


아빠 엄마의 입모양을 유심히 관찰하던 갓난아이는 몇 달이 지나 ‘아빠’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통의 아이들은 ‘엄마’를 먼저 부르기 시작하는데 우리 아이는 특별하게도 ‘아빠’를 먼저 불렀다. 한 번 ‘아빠’하고 불러서 ‘응?’하고 대답을 하면 또 ‘아빠’를 한다. 나는 대답을 멈추지 않았고, 아이는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고마운 것은 아내다. 그녀는 내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끊임없이 아이에게 ‘아빠’를 가르쳤다. 그녀는 아들과 사랑을 나누는 자리에 ‘아빠’라는 존재를 늘 참여시켰다. ‘엄마’ 덕분에 ‘아빠’는 ‘존재’와 ‘부재’에 관계 없이 아이를 풍성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을 멈추지 않았고, 아이는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슬픈 아버지들의 자리>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아빠’들은 얼마나 소외되어 있었던가.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는 자녀 교육을 전담하는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독박 육아’라고 부른다. ‘아빠’의 존재는 상징적일 뿐, 사실 부재해도 생활에는 크게 지장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 ‘아빠’들을 향해 어머니들은 ‘바깥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깥 일’을 하는 것으로 가치를 증명해왔다. ‘바깥 일’은 ‘아빠’들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우리 가정의 환경이 나아지면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겠지

시대가 몇 번을 거듭하고 나서야 우리의 아빠들은 그것이 얼마나 빗나간 생각이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빠의 체온이 담긴 말 한마디였다는 것을, 애정을 담아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 몇 초의 스킨십이 필요했다는 것을 우리의 아버지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즈음, 아이들은 이미 아버지를 내려다볼만큼 커 있었다. 마음의 상처를 품은 아이들은 월셋집 단칸방이 50평 아파트가 된다고 한들 아빠의 부재에 면죄부를 주지 않았다. 중년을 스쳐지나며 아빠는 비로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만 집안 어디에도 아빠의 자리는 없었다. 가장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아빠는 가족들의 근처에서 배회하는 '주변인'이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의 아버지들은 누구보다 큰 피해자이다. 직장에서 온갖 무시와 설움을 견딘 것이 다 누구 때문이었는가.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견뎌내고, 가장 깊고 어둔 새벽을 거리에서 맞이했던 것은 누구를 위함이었나. 눈 앞에 아른거리는 아들, 딸들을 생각하며 현관 벨을 누르려다가 잠이라도 깰까봐 한참을 멍하니 등을 벽에 기댄 채 주저 앉던 그 마음을 누가 안단 말인가. 사랑? 그걸 꼭 말로 해야만 아는가? 아빠의 고뇌가, 아빠의 야근이, 아빠의 늦은 회식이 사실은 사랑이었음을. 아이들의 재롱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 눈망울에, 아내가 해주는 밥을 허겁지겁 먹는 그 말없는 시간 속에 사랑이 깃들어 있었음을. 마치 인어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구하고 목소리를 잃은 채 바라만 보았듯이, 아빠들은 그렇게 가족들의 주변부에 남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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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지만 괜찮은 옷을 입다>


슬프지만 그런 아버지들을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우리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바꾸어내야 했다. 우리 아버지들의 깊은 사랑과 가족을 향한 헌신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사랑을 표현할 순간들을 놓쳐 가족의 주변인으로 표류하는 길은 반복하지 말아야 했다.

아내와 나는 모두 초보 부모였지만 아내는 마치 이미 시행착오를 겪은 선배 같았다. 아내는 아이가 자라나는 결정적인 순간들,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아빠인 나를 틈 속에 밀어넣었다. 나는 아이가 자라나는 모든 상황에 함께 했다. 아이가 처음 뒤집었을 때 나는 아내가 보내준 영상으로 그것을 지켜보았고, 퇴근하고 나서 함께 축하해주었다. 아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할지 몰라 그저 바라만보고 있을 때, 아내는 아이가 듣고 행복해할 수 있는 톤과 어조를 시연했다. 전형적인 주변인이 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을 다 가지고 있던 나는 아내가 골라준 별로 입어보지 않은 옷을 입게 되었다. 어색했지만 거울을 보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서서히 나는 정말로 ‘자상한 아빠’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표현해내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아이가 처음 뒤집었을 때 나는 아내가 보내준 영상으로 그것을 지켜보았고, 퇴근하고 나서 함께 축하해주었다.

나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시간만큼이나 아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아이가 말을 잘 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나는 가끔 아이를 데리고 나와 데이트를 했다. 아빠와 단둘이, 또 엄마와 단둘이. 아이도 그 시간의 묘미를 알아가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함께일 때도 좋지만, 엄마와 아들, 아빠와 아들, 엄마와 아빠 이 세 가지 콤비네이션도 좋았다.


<세 살 아들과 함께 시작한 여행>


‘엄마’라는 중보자는 ‘아빠’와 ‘아들’을 완전히 이어주었다. 아이가 세 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가게 된 해 즈음에는 몸에 맞지 않는 것 같던 ‘아빠’라는 옷이 마치 맞춤복과 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 옷을 입고 아들과 틈틈이 이 곳 저 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아들이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하나이다. 여수의 이층버스를 타고 곳곳을 둘러보기도 했고,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커다란 크루즈를 타고 돌산대교 밑을 지나던 여수의 밤 역시 잊을 수 없다. 서천의 국립생태원에서 다람쥐 버스에 함께 몸을 싣기도 했고, 서울의 남산타워, 롯데월드타워의 꼭대기에 올라 우리의 속세가 얼마나 장난감과 같은지 내려다보기도 했다. 부산의 송도해상케이블카, 태종대, 광안리.. 대구의 앞산케이블카.. 우리는 아주 오래된 연인보다도 추억이 더 많아졌다.

20506958_1404888426225443_5728188750628288970_o.jpg 전주의 한옥마을은 아들이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하나이다.
45010815_1892965107417770_7032444996519198720_n.jpg 여수의 이층버스를 타고 곳곳을 둘러보기도 했고,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커다란 크루즈를 타고 돌산대교 밑을 지나던 여수의 밤 역시 잊을 수 없다.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에서 가이드는 아들이다. 물론 처음 가 보는 미지의 곳에서는 아빠의 도움이 조금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베테랑 여행가가 된 영원이는 어디를 가든 관광안내소에 가서 그 도시의 팜플렛을 펼친다. 아직 글씨 하나 모르지만 픽토그램과 사진만으로 영원이는 우리가 갈 곳을 골라낸다. 아빠는 아이가 고른 목적지들에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이동 방법만을 제공한다. 계획하고 즐기는 것은 아이의 몫이다.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는 일, 매표를 하는 일, 길을 묻는 일, 감사를 표현하는 일, 심지어 사진을 찍는 일 모두 아이의 몫이다.

20017546_1392141090833510_7165138541721296522_o.jpg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에서 가이드는 아들이다.



<사랑의 확신이 들 때 즈음: 아들의 네 살>


매순간 단 둘이 여행을 떠날 때마다 아들은 이전보다 부쩍 커 있었다. 먼 훗날, 훤칠하게 장성한 아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만큼, 그렇게 영원이는 멋지게 자라주었다. 그렇게 서서히 아들은 사랑 안에서 독립해갔고, 부모님이 없어도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도, 부모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도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조마조마했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아이를 사랑과 인정 속에 푹 담그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는 그 사랑과 인정의 연못에서 무심하게 걸어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아들의 네 살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해도 네 살짜리 아들의 나홀로 중국 여행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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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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