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네 살짜리 우리 아들은 어쩌다 홀로 중국에 가게 되었나>
우리는 아들이 네 살 되던 해, 중국에 홀로 보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의 첫 아이, ‘영원이’는 엄마, 아빠 없이 홀로 중국에 갔다. 그것도 한 해에 두 번이나. 아들의 첫 번째 중국 여행은 2주, 두 번째 여행은 한 달간 이어졌다.
우리는 어쩌다가 아들을 그렇게 보냈을까. 거꾸로 말하면 우리 아들은 어쩌다가 홀로 중국에 가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 아들은 그 날 처음 보는 삼촌의 손을 붙잡고 출국장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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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서 해볼까 한다.
<사랑과 인정에 푹 담그기>
자녀를 부모의 사랑 속에 푹 담갔다가 꺼내어 세상에 내놓는 일은 지구가 이어져온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일들이다. 그 일의 시작은 뱃 속에서부터이다. 심지어 세상을 창조했다던 조물주도 ‘인간’으로 오기 위해 여자의 뱃속에서 열 달을 살았다고 하니, 이러한 일은 ‘신’도 예외가 없었다고 하겠다. 나의 아내에 뱃속에도 2014년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천사가 찾아온 그 날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그 아이에게 언어로, 몸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신호에 응답하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부모는 배와 같다>
나는 부모가 배와 같다고 생각한다. 배는 승객을 태워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우리에게 첫 아이를 주셨을 때, 우리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다.
이 아이를 우리의 소유로 착각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께서 맡겨주신 아이로 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아이가 본인의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배’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거기까지만’이다. 그 이상의 욕심이 생길 때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을 기억하자.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다짐했고, 그것은 우리의 양육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물주의 위탁 사업>
‘모세’라는 아이는 원래 히브리인이었는데 이집트가 히브리인들을 탄압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목숨이 위험했다. 어느 해에 이집트의 왕은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한 히브리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 ‘모세’의 아름다움을 보고 차마 그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결국 그 부모는 갈대로 상자를 엮어 아이를 나일강에 띄워 보내게 되는데 때마침 그 아이를 발견한 것은 이집트의 공주였다. 공주는 아이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이를 키우고자 마음을 먹는데, 그의 유모로 구한 사람이 바로 ‘모세’의 친모, ‘요게벳’이었다. 그 공주는 ‘요게벳’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아내는 ‘바로의 딸’로 불리는 이 공주의 부탁이 마치 조물주가 영원이를 우리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그 짧은 문장 속에 우리가 왜 아이를 키우는지, 어떻게 키워야 할지가 들어있었다. 아이가 우리의 소유라는 인식은 차츰 없어졌다. 그리고 사랑과 인정에 푹 담겨있다가 언젠가 세상에 우뚝 설 영원이를 상상했다.
<2015년, 가정이라는 인큐베이터에서>
처음에는 그냥 아기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아이는 이미 뱃속에서부터 부모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고, 부모의 행동을 보고 있다. 아이의 눈에 맺히는 모든 상(像)이 그 아이의 기억과 정서로 들어간다. 그중의 일부는 무의식으로, 일부는 트라우마로, 일부는 행복의 저장소로 흘러들어 간다. 훗날 아이가 장성했을 때에는 논리적으로 그 기억을 소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기억들이 그 아이의 세포로 낱낱이 흘러들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영원이가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마치 누군가의 파송이라도 받은 천사처럼,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리만치 나도 아내도 그 아이를 아이처럼 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갓난아이에게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