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애타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네 살 아들의 출국 날이 다음 날로 다가왔다. 오늘은 6월 29일. 아들의 비행기는 6월 30일 늦은 밤 비행기였다. 도착하면 딱 7월 1일이 되는 비행기.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매일 지나갔던 길인데도 평소와 같지 않은 풍경처럼 느껴졌다.
원장님과 담임 선생님께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무기한 자체 방학'을 말씀드렸다. 담임 선생님은 늘 상의해오던 부분이지만서도 그 때마다 늘 걱정스러워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네 살인데요... 엄마, 아빠도 없이 괜찮을까요?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원이는 소원이가 태어난 5월부터 6월까지 엄마의 품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상태였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이미 정서적으로 심히 고갈된 상태. 이제 겨우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 모자른데 갑자기 홀로 중국을 간다니. 일반적인 정서와 상식으로도 괜찮은 상황은 아니었다.
네 살 아이가 중국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리는 아이의 말을 지나치거나 웃어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북경에는 아이가 끔찍이 사랑하는 이모가 있었고, 이모도 영원이를 많이 사랑해서 아이를 어떻게든 베이징에 데려오고 싶은 눈치였다. 아빠도, 엄마도, 영원이도, 이모도 마음은 같았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상의와 토론, 심지어는 찬반 투표까지 거쳤지만 만장일치 찬성이었다. 적어도 당사자들의 의사에 문제는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었다.
누가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인가?
1안은 이모가 한국에 나와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방안이었다. 이 방법은 일단 경제적이지 못하다. 이모는 단순히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베이징에서 공항까지 와야 한다. 이 방법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2안은 아빠가 영원이를 데려다주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때가 때마침 교원 채용건이 걸려있어서 불가능했다. 다른 일들은 미뤄두었다가 할 수 있지만 채용 프로세스는 지원자들과의 약속이라 내 개인 사정으로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신생아를 데리고 영원이를 데려다주는 방법도 있긴 했다. 이건 말도 안된다.
3안은 영원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제3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것도 성사만 된다면 좋겠지만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대안이었다.
3안이 좋은 이유는 이모가 한국에 나왔다 들어가는 것보다, 아빠가 중국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배달’만 다녀오기에는 아무리 가까운 베이징이라지만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컸다. 성사만 된다면 1안, 2안보다 훨씬 좋은 대안이었다.
3안이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는 ‘네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그 날 처음보는 사람을 따라 출국장을 나설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갓 태어난 동생 때문에 5, 6월을 엄마와 거의 떨어져서 보내야 했던, 보기만 해도 짠한 아들이 생면부지의 타인의 손에 이끌려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해보니 그것도 그리 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도 아니고 네 살이라니.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을 다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선뜻 나서리라고 예상되지는 않았다. 주변 지인들을 통해 수소문 해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꿈만 같은 ‘네 살 아들의 나 홀로 중국’ 여행 프로젝트의 실행을 포기하려 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 책도 나오지 못했을수도.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못해준다는 생각에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무렵,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생겼다. 처제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지인의 지인인 분이었는데 곧 결혼을 앞둔 남자분이었다. 한국에 출장을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이미 티켓팅을 해놓았다며 6월 30일 밤 비행기라도 괜찮으시면 아이를 보내라고 했다.
예상치도 못한 ‘프로젝트 성사’에 보내고자 했던 나와 아내조차도 한동안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나하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원이의 비자 신청과 공항에 바래다주는 일정을 준비했고, 아내는 아들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이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분의 이름은 장○○이었다. 우리는 영원이가 생전 처음보는 분과 함께, 게다가 잠을 자야하는 밤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 걱정을 놀이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장○○ 삼촌 놀이’이다. (물론 우리 집에서만 유명하다.)
그 놀이는 처음 장○○ 삼촌을 만나서부터 공항에 내려 짐을 찾고 꿈에 그리던 이모를 만나는데까지를 연극처럼 시뮬레이션 해 보는 놀이였다. 나는 장○○ 삼촌이 되고, 영원이는 영원이 역할을 했다.
아이는 그 놀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 놀이의 3분의2 이상은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놀이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는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로 비행기 안내방송까지 해주었다. 비행기를 이미 몇 차례 맛 본 영원이는 비행기를 타는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황홀해했다. 그 비행기의 황홀함과 연합되어 장○○ 삼촌의 캐릭터도 함께 황홀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빠의 연기는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지만 장○○ 삼촌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손을 잡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연극을 하면서, 아이는 아직 보지도 않은 장○○ 삼촌과 이미 많이 친해져있었다. 우리가 흔히 SNS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만났을 때, 또는 브라운관으로만 만나던 연예인을 실제로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처럼 말이다. 공항에서 진행하는 보안 검색이나 티켓과 여권을 보여주고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연습도 훌륭하게 해냈다.
우리는 장○○ 삼촌의 비행 일정에 모든 것을 맞추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일정에 비자 사진도 없어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비자사진을 찍었었다. 그 사진을 아이의 여권과 비자신청서류와 동봉하여 서울에 있는 비자 발급 대행 업체에 익일특급으로 보낸다. 그 업체는 우리의 출국날에 맞추어 비자가 붙어있는 여권을 공항에 퀵으로 보낸다. 그러면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여 그 여권을 찾는 것이다.
비행기 시간은 밤 12시인데 비자 발급 대행 업체 직원의 퇴근 시간은 6시, 늦어도 7시에는 들어가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전주에서 인천까지는 대략 4시간. 나와 영원이는 6월 30일 오후 2시 리무진을 예약했다. 직원이 퇴근하기 전에 인천공항에서 여권을 찾고, 영원이와 저녁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영원이를 데리고 가기로 하신 분을 밤 10시 쯤 만나 출국장에서 배웅을 하는 시나리오가 이제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이제 내일 이시간이면 영원이는 엄마, 아빠 없이 중국 하늘 아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이상했다. 하지만 네 살 아들은 평온해보였다.
이천년전 붐비는 예루살렘의 한 성전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찾아 다급한 마음으로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하고 묻던 예수의 표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싶을만큼 아이는 내일의 중국을 담담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 속에는 자꾸만 ‘장기적출’, ‘인신매매’ 같은 단어들만 시시때때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아기 모세를 세계에서 제일 길다고 불리우는 나일강에 띄워보내던 요게벳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렇게 나의 애타는 밤이 지나고, 아파트 창가로 하얗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