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의 중요성
옛날 어른들 말씀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하루에도 ‘거짓말’을 세 번 한다고 했다.
그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들은 보통 이런 것들이다.
아기가 저를 보고 ‘엄마’라고 했어요
막 태어난 아기가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생긋 웃었어요
아이의 발달을 지켜보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말 하나, 몸짓 하나에도 놀라워하는데 그것을 제3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어른들은 자기 자녀에게 정신을 빼앗겨서 그렇다며 부모를 거짓말 쟁이 취급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진짜 키워보니 의문이 든다. 어른들 말씀대로 부모의 말들은 과연 진짜 거짓말이었을까?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를 가장 잘 가려주는 21세기 문명의 이기(利器)가 바로 ‘동영상’이다. 사실 순간에 일어난 일의 진위를 가리는 시비는 육아보다도 운동경기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VAR(Video Assistant Referees)’이 도입되면서 이런 논란은 종식된 듯 하다. 판정 시비가 붙으면 바로 감독은 ‘VAR 판정’을 신청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 주심과 부심은 동영상을 돌려보며 본인들의 판정이 옳은 판정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독한다. ‘낙장불입’이었던 심판의 판정도 이제는 번복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아내와 나의 육아에서도 예외 없이 그러한 순간들이 왔다. 큰 아이가 매일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는 영원이가 신나게 옹알이를 하자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영원아 안녕? 즐거워? 신이 나? 너무 좋아? 좋아 좋아?”
영원이는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하다가 갑자기 너무나 정확하고 명확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
영원이가 태어난지 불과 5개월이 조금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엄마의 치기 어린 거짓말로 묻혔을 사건이다. 하지만 아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매 순간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장면은 고스란히 비디오에 찍혀있다. 가끔 SNS에 업로드 했던 사진과 동영상 덕분에 큰 아이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랜선 이모'들이 꽤나 있을 정도이다.
나는 가끔 네 살이 된 영원이와 아기 때의 동영상을 돌려보곤 하는데 영원이는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재연하곤 한다. 그것은 아빠와 아이의 놀이이다. 아빠는 기억에서 사라질 법한 자녀의 유아 시절의 단면을 현재의 자녀로부터 소환해낸다. 또한 자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법한 자신의 행동을 복습함으로써 아기 때 부모와 사랑을 나누었던 순간들을 재확인한다. 20세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전설처럼 들었다.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했었다고?
믿거나말거나였다.
하지만 21세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역사를 직접 눈 앞에서 전자기기로 확인한다.
그리고 아내는 그렇게 매번 '육아 VAR'을 통해 20세기 엄마들의 전통적인 누명을 벗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다. 아이들을 '하향 평준화' 시키는 건 아이 스스로가 아니라 어른들이다.
어떤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이렇게 조그만 게 뭘 알겠어
아이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이 정도 비속어는 사용해도 괜찮겠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다 보고 있고, 다 듣고 있으며, 다 흡수하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자궁에서부터 수영을 했으며, 그 어떤 좁은 문보다도 좁은 문을 비집고 세상에 나올만큼 힘과 의지도 강하다. 당장 말을 못한다고 해서 바보가 아니다. 아이들은 다 듣고 있고, 보고 있다. 그리고 수십만번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비로소 ‘한 단어’를 토해내는 것이다.
아이의 무의미한 옹알이에 진심어린 반응을 하는 것은 아이의 언어 발달에 필수이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그깟 ‘거짓말쟁이’ 소리는 백 번도 들을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혀를 찬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 아이가 생각과 정서를 자신의 혼에 담아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다만 ‘극성’보다는 ‘정성’이 낫다. 내 아이만 훌륭하다고 추켜세우는 것이 ‘극성’이라면 다른 아이들의 발달에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정성’이다. 아이가 남들보다 뒤쳐졌을 때 속상해하며 아이의 발달을 강압하는 것이 ‘극성’이라면 아이의 속도에 맞게 진심 어린 반응을 해주는 것이 ‘정성’이다.
그 옛날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오죽했으면 ‘어린이날’을 제정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 속에 아직도 아이들은 '함께 하는 대상'이 아니라 '격리의 대상'일지 모른다.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인 풍경을 보자. 아이들은 절을 하거나 재롱을 부리고 용돈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인가? 아이들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아주는 어른이 있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장성하여 20대가 되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매번 명절 때가 되면 결혼이나 취직 이야기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는 어른들에 관한 기사가 줄을 잇는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아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많이 낯설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 들지 말라’는 핀잔을 두 세 번 들으면 더 이상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함께 하지 않는다.
나와 아내는 물론 때와 장소는 가려야 하겠지만 우리의 아이를 '어른들 말씀하실 때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네 식구가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구나 그 자리의 진행자가 될 수 있다. 오늘 하루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친구들, 선생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감사한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일은 부모로서 해야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018년 12월 19일,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아이가 한 달 동안의 중국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지 8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도 나는 가족들과의 저녁식사의 테이블로 향한다. 8일이 지났지만 아들의 중국 여행기는 매일 무궁무진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