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이천만 속의 고독을 생각하다
거의 20시간을 자지 않고 황해를 건너간 네 살 소년과 베이징의 20대 원더우먼은 2018년 7월의 시작과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 네 살 소년은 그녀가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중국 생활을 통틀어 처음으로 한 방을 같이 쓰게 된 사람이자 그녀를 보기 위해 중국에 가장 오래 머문 방문객이기도 했다.
20대 원더우먼은 큰 용기를 내어 네 살 소년을 보내준 나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거의 매일 같이 했다. 한참 손이 많이 가는 아이를 보낸 것이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한 우리에게 그러한 말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녀가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임을 잘 아는터라 그녀가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 더욱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인구 이천만이 넘는 베이징이라는 도시에서 홀로 십여년을 지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많다. 나는 처음 독립한 것이 스물여섯되던 해의 연말 즈음이었다. 그 때는 이미 부모님의 사랑도 충분히 받았고, 전쟁과도 같던 사기업에서의 짧은 생활을 마치고 지금의 직장인 대학으로 옮길 때라 마음도 그리 어렵지 않았었다. 독립할만해서 독립한 것이었기 때문에 홀로 자취방에 있을 때도 외로움보다는 자유로움이 더 컸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한참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하는 십대 중반의 나이에 홀로 하얼빈에서 중국 생활을 시작했었다. 겨울이 되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하얼빈의 추위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쓸쓸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그녀가 홀로 독하게 이루어낸 학업적인 성취를 두고 칭찬하곤 했지만 형부와 언니된 우리의 마음에는 그녀가 십대를 관통하던 그 시절, 얼마나 가족들의 온기를 필요로 했을지 항상 생각하곤 했었다.
나는 결혼을 전제로 아내와 교제를 시작하기 위해 지금의 처가 식구들께 처음 인사를 드리러 포항에 갔던 날, 처제를 처음 보았다.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잘 생기고 나은 인상’을 보여드리기 위해 안경을 벗고 갔었다. 일회용 렌즈조차 껴본적이 없던 때였던터라 그야말로 ‘맨 눈’이었다. 나는 두 눈 모두 시력검사판의 가장 윗 글자조차 읽기 힘든 수준의 시력을 가졌다.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이 인사를 드리러 갔던 셈이다.
그 날 안경을 벗어던져서 뵈는 게 없다보니 더더욱 겸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나는 그 날 부모님들을 뵌 그 자리에서 신랑감으로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 때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장인 어른과 장모님은 한결 같이 나를 믿어주고 계신다.
문제는 이미 합격을 한 상태에서 보게된 2차 실무진 면접, 바로 처제와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마음의 ‘비열’이 큰 사람이었다. 양은냄비와 달리 뚝배기는 오랫동안 불에 올려놓아야 비로소 끓기 시작한다. 처제는 뚝배기와 같은 마음을 지녔다. 아직 나를 식구로 맞이할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이 돌연 합격 통보를 그 자리에서 내리시니 아직 불에 올려놓지도 않은 뚝배기가 당황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고, 첫 만남에서 부모님들에 비해 크게 열리지 않은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만큼의 시간이, 함께 하는 추억이 필요했던 것 같다.
2012년의 가을이 가장 아름답던 어느 날, 우리는 정식으로 교제한지 1년을 조금 넘겨서 결혼에 골인했다. 아내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표현한지로부터는 5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연애는 짧았지만 그녀를 바라본 세월은 길었던 것. 그 때의 나는 스물아홉살이었다.
우리가 부부로서 처음 맞던 겨울, 나의 ‘서른’을 앞두고 나와 아내는 홀로 있는 처제를 만나러 베이징에 가보기로 했다. 아내도 포항 부모님도 졸업식 때나 잠깐잠깐 가 보았지 처제가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전화를 통해서만 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녀는 정말 혼자 커 온 셈이었다. 아내는 지금이라도 꼭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생긴 연말의 시간은 처제와의 추억을 쌓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마련해 주신 시간 같다.
그 때의 베이징은 무척이나 추웠다. 서울과 비슷한 위도에 있는 것 같지만 베이징은 여름에는 서울보다 덥고, 겨울에는 확실히 서울보다 춥다.
그 추위의 반작용이었을까. 강추위의 세기만큼이나 우리의 관계는 많이 가까워졌다. 처제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차분한 이성이 감성을 어느 정도 통제해내는 심리학적 기제도 비슷했고, 무엇인가를 집중해내는 집념에도 공통점이 있었으며, 정보는 쉽게 설명하나 마음은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면도 비슷했다. 기질상의 공통점이 워낙 많다보니 나중에는 눈만 마주쳐도 서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단계가 왔다. 숨겨둔 오빠와 여동생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처제와 나의 그러한 가까워짐을 보며 아내는 행복해했다. 우리는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었고, 큰 뚝배기와도 같은 처제의 마음에도 가족으로서의 온기가 배기 시작했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날 밤, 나와 아내, 처제 세 사람은 칼바람이 부는 베이징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 인구 이천만의 도시였지만 너무 추워서 거리에는 사람도 별로 없던 그 날 밤, 아내는 우리 셋이 손을 꼭 붙잡고 서로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걷기를 제안했다.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처제와 나도 어색함을 떨쳐버리고 손을 꼭 붙잡기로 했다. 그 날의 온도는 너무 추웠다는 것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의 온도는 우리의 체온 그 이상이었다.
내가 곧 서른 여섯 살을 바라보고 있으니 벌써 그로부터도 6년이 더 흘렀다.
아들은 자라면서 늘 화상으로 자신의 이모와 만나곤 했다. 아내와 처제는 아이를 재워놓은 심야부터 동이 틀 때까지 화상으로 통화하는 일도 잦았다. 언제 어디에 처제가 화상으로 연결되어 있을지 몰라 나는 귀가한 후에도 주변을 살피고 옷을 갈아입었을 정도다.
보통 가족은 함께 산다. 함께 살며 서로 안아보기도 하고, 체온을 느끼며 사는 것이 가족이다. 하지만 때로 현실은 그러한 행복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일들로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게 목격된다.
우리도 처제를 가깝고도 먼 나라에 두고 살면서 늘 함께 하고 싶어한다. 미세먼지가 극심한 날이면 사람들은 중국을 욕하기 바쁘지만 우리는 베이징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콜록대고 있을 처제를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곤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녀의 자취방에 들인 네 살의 소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네 살 소년은 처제가 성인이 되어 경험하는 베이징의 첫 가족이자, ‘가족이라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첫 대상이었던 것이다.
소년은 그 중차대한 자신의 사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행복해하며 이모와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살 소년이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날,
그는 놀랍게도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곳에 가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