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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공작 Mar 24. 2022

#돈타령

아무튼, 말장난

칠레산 냉동 대패 삼겹살이 한 근에 칠천 원이었다. 얼마 전 이마트에서 스캔했던 노브랜드 냉동 대패 삼겹살이 1킬로에 만 이천팔백팔십 원. 두 끼에 나눠 먹으려다 한 번에 만 원이 넘는 돈을 지출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냥 빈손으로 나왔었다. 살까, 말까. 정육점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지갑에 노량진 고시식당 식권이 세 장이나 남아있었다. 열 장에 사만 사천 원이니까 한 장에 사천사백 원. 똑같은 한 끼라도 삼겹살 구이는 조리가 완료된 밥과 국, 실한 반찬들에 양적으로도 영양학적으로도 비할 게 못된다. 그런데 가격마저 비쌌으므로 고시식당을 고르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얼마 전에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1인분에 만 팔천 원 하는 삼겹살. 겨울은 고기가 고픈 계절이라고 말을 꺼낸 게 화근이었다. 다들 번듯한 직장의 2, 3년 차다 보니 맛만 있으면 얼마든 지불할 능력이 되었지만, 나는 갓 동계 인턴을 마친 사회 초년생이었다. 체급이 달라도 한 번 링에 오른 이상 비싸다고 난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쩔 수 없이 불판 앞에 앉았다.



내가 구울께.



굽지도 못하면서 가위와 집게를 받아들고 삼겹살 덩어리들을 숭덩숭덩 잘랐다. 만 팔천 원이 구천 원, 구천원이 사천오백 원으로 점점 작아졌다. 오백 원에서 한 번 더 고를 외칠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K가 너무 잘게 자르면 맛이 떨어진다고 조언해 주었다. 상냥한 방해에 가위와 집게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다. 얼마짜리 고긴데, 함부로 다루면 안 되지.



오래간만에 모인 사람들끼리 나눌만한 이야기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람들은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취업했거나, 사업을 시작했거나, 유학을 준비하고 있거나, 고시랑 전문직 시험 최종 합격을 눈앞에 둔 이들의 사연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그러다 S가 "범생아,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하고 묻길래, 삼겹살이 고프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돈이 고프고, 시간이 고프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프고, 대단한 사람이 되고프다는 뜻이라고, 사족을 달려는 입을 쌈으로 틀어막았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세상에서 불행은 자랑이 되지 못하니까. 하지만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잘 풀릴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들 위로해 주었다.



돈 워리, 비 해피. 불판 위에서 한 끼 식사가, 이번 주 생활비가, 이번 달 공과금이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고기 다 타겠다. 어서 먹자.



집으로 돌아가던 길, 나는 한동안 행복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 팔천 원짜리 삼겹살이 타들어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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