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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공작 Mar 21. 2022

#명분이 필요해

한입거리 로맨스

"밖에 눈 와요!" 금요일 정기 회의,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출근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인턴 나부랭이가 감히 대리님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사무실에서 이루어지는 화상회의라 일거수일투족이 노출 중인 위험한 상황,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 했습니다. 눈이 온다고 말씀을 드려야 조심조심 댁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테니까요.



대리님은 월요일에서 금요일, 분당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선릉에 있는 회사까지 출퇴근을 하십니다. 매일 아침 여덟시 반 언저리에 톡, 톡, 톡, 톡, 계단을 올라, 삑, 삑, 삑, 삑, 비밀번호를 누르십니다. 출근 시간은 아홉시까지지만, 다른 분들이 아직 출근하시기 전의 평온을 즐기기 위해 일찍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뭐, 그 평온을 제가 출근 이틀 차만에 깨버렸지만 말이죠.



출근 시간대를 피하려고 일찍 움직였는데, 회사 주변에 여덟시에 도착하고 말았지 뭐예요. 출입문 비밀번호를 모르니 주변에서 알짱거리다, 대리님이 보이길래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대리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출렁하더니, 앞으로 고꾸라지며 배꼽인사를 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해, 다음 날부터 눈도장을 찍히려고 대리님보다 회사에 빨리 도착했습니다. 성실함을 어필해서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 건데, 생각해 보니 그녀 입장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한 제가 좋게 보였을 리 만무하겠네요.




대리님은 오래 보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현관에 들어서면 대리님의 노란 털 슬리퍼가 저를 반깁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잿빛 슬리퍼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단연 돋보여서, 그것을 기준 삼아 어질러진 풍경의 오와 열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면 계단을 오르는 새하얀 단화 소리가 들리는데, 그땐 정리하다 말고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고는,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면 대리님도 살짝, 눈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곧장 탕비실로 가십니다. "나도 커피 마셔야지" 하고 중얼대며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보면, 안쪽에서 대리님이 카페라테가 내려지는 동안 함께 먹을 과자를 고민하고 계십니다. 커피에 곁들일 디저트를 고르는 게 그렇게도 즐거운지, 나지막이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처음에는 제 존재감이 옅어서 눈치채지 못하신 건 줄 알았는데, 몇 번 아침을 함께 보내고 나니, 그냥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더라고요.



점심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리님께서 밥값을 아끼려고 도시락을 싸서 다니시길래,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 저도 서브웨이에서 '이달의 썹'을 포장해 옵니다. 사무실 뒤편에서 싸온 사람들끼리 밥을 먹을 때, '편의점 도시락'이나 '아내가 싸준 도시락'은 매일같이 달라지지만, 대리님은 한결같습니다. 헬로키티 2단 도시락 안에 계란말이와 소시지 야채볶음, 거기에 제철 과일이나 샐러드가 들어있는 단출한 구성입니다. 매번 똑같은데도 늘 설레는 표정으로 도시락을 열고는, 반찬을 곱게 집어 입에 넣고 행복하게 오물거립니다. 귀여움에 빠지면 답도 없다더니, 그 모습에 꽂혀 대리님을 덕질하는 재미로 회사를 다닙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번 회의는 올해 처음인지라 모든 사내 구성원이 참여했습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온라인상에서 모였지만요. 저로서는 행운이었습니다. 대리님과는 부서가 달라 업무 중에는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는데, 줌 화면으로나마 뵐 수 있었으니까요.



마지막 순서인 '대표님 격려 말씀'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처럼 늘어져갈 무렵, 뽁뽁이를 덧댄 유리창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눈송이가 팔랑팔랑 날리는 정도였는데, 이내 굵은 눈발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습니다.



펑펑 내리는 눈에 마음을 사로잡혔다가, 대리님이 화면에 잡혀 반가워하다가, 눈길에 갇힌 그녀가 눈에 밟혀


무심코, 밖에 눈이 내린다며 다가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제넘은 짓을 한 것만 같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화면 속 대리님이 살짝 뒤를 돌아 창밖을 바라보시더니,



"엄청 오네요. 이 정도면 쌓일 것 같죠?"


하고 답장을 보내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처음인데, 뭐라 답하지? 쌓일 것 같다고 동조할까? 아냐, 소신 없어 보일 거야. 그래, 금방 그칠 것 같다고 말씀드리자. 눈발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걱정이실 테니까. 근데 안 그치면, 그럼 그냥 거짓말한 게 되어버리는데? 어쩌지?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기상청에서는 저녁까지 눈이 내릴 거라 전망하는 것 같다며 책임을 미뤘습니다. 두루뭉술하고, 무미건조하게. 재미없는 놈 같으니라고.




저녁 6시, 인턴은 칼퇴해야 한다는 과장님의 말씀을 받들어 부랴부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습니다. 폭설의 여파로 세상은 여전히 새하얬지만, 다행히 눈은 그친 상태였습니다.



아 맞다, 대리님께 눈 계속 올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잘못된 정보는 정정해야 하니까, 눈이 멎었으니 댁에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겠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다행이네요. 또 내릴지도 모르니, 오늘은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할까 봐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주말 동안 푹 쉬고, 다음 주에 또 봐요."



그 말을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벌써 겨울이 끝나고, 세상은 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비록 눈꽃은 다 떨어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안부를 여쭈고자 합니다.


곧 있으면 춘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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