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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공작 Mar 19. 2022

#스위트 아메리카노

한입거리 로맨스

처음 아메리카노를 마셨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 대학 입시를 마치고 동경하던 친구가 살던 대구를 방문했다. 친구의 안내를 받으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지쳤지?"라고 말하며 그녀가 평소에 자주 간다는 카페에 데리고 갔다. 차분함을 자아내는 연한 잿빛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카페가 처음이었던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잠시, "먼저 주문할래?"라는 그녀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카페=커피라는 공식밖에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는데, 메뉴판에는 난생 처음 보는 단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카페라테,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 프라페, 아포카토.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임기응변이랍시고 그녀와 같은 걸 달라고 말해버렸다. 숙맥치고는 그럴싸한 대답이다고 생각했는데, 주문한 음료를 받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짜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왔을 때 솔직하게 대답할 걸 그랬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두 잔 나왔습니다." 손바닥만한 유리컵에 가득 담긴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 어릴 때 한약을 많이 먹어 이상한 걸 마시는 데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사약의 향을 맡으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그녀를 보며, 주인을 따라 목숨을 끊는 종의 심정으로 잔에 입을 갖다댔다. 끔찍한 맛이었다. 검은 크레파스를 갈아마시는 듯한 씁쓸함이 식도 안을 질척였다. 캑캑거리며 애타게 물을 찾자, 그녀가 근처에 있던 물병에서 물을 떠다주며 웃었다.



"커피 못 마시면 말하지 그랬어."


"캔커피는 자주 마시니까 괜찮을 줄 알았지."


"저기 시럽 있으니까 넣어먹어. 좀 나을거야."



컵의 1/3 정도를 시럽으로 채웠지만 전혀 달아지지 않아서, 결국 내 남은 커피는 그녀의 차지가 됐다.



"너무 달다."


"난 그래도 죽을 것 같던데."


"우리 둘 다 이제 어른인데, 넌 아직 어리구나."


"커피를 달게 느끼는 건 인생이 쓰기 때문이래. 내 인생은 아직 너보다는 달콤하다는 뜻이겠지."



"뭐라는거야"라고 대답하며 그녀는 웃었다. 사약을 두 잔이나 마신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한 미소로.




나를 역까지 바래다주던 길, 그녀는 내 잔에 몰래 설탕을 넣었다고 고백했다.



"너 단 거 좋아하잖아. 나랑 같은 거 마신다길래 쓸까봐 넣었는데, 그다지 도움이 안됐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라, 춥다고 중얼대며 서둘러 목도리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녀와 어울리는 음료를 주문했는데, 오히려 배려받다니. 그녀에게 맞춰가려던 나와 나에게 맞춰주려던 그녀는, 그렇게 아메리카노 두 잔 분의 거리를 두고 겨울밤의 밤거리를 걸었다.



그 날로부터 벌써 7년이 지났다. 나는 전보다 카페 메뉴를 많이 알게 되었다. 카라멜 마키아토, 초콜릿 프라푸치노, 허니라테, 블루베리 스무디. 하지만 아메리카노는 그날 이후로 입에 대지 않고, 여전히 동경으로만 남아있다. 씁쓸하면서도 조금은 달콤했던 스위트 아메리카노만큼, 애틋했던 맛을 느낄 순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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