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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공작 Apr 01. 2022

#너의 밤은 나의 낮보다 아름답다 1화

한입거리 로맨스

“나의 밤은 너의 낮보다 아름다워.” 너는 입버릇처럼 그리 말하곤 했다. 우리는 남들보다 해가 더 빨리 지고, 빨리 뜨는 곳에 살았다. 밤에는 마을에 몇 없는 가로등만이 길목을 은은히 밝혔고, 새벽에는 일찍 일터로 떠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비록 서울 외진 곳의 다 쓰러져갈 듯한 판자촌이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갓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였다. 학자금 대출로 허덕이는 와중에 비싼 월세마저 부담할 수는 없어서, 최대한 싼 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우범지대에 있고, 벌레도 자주 나오는데 괜찮아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걱정 어린 부동산 중개사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계약서에 지장을 찍어버렸다. 그 경솔한 판단 덕분에, 나는 너와 이웃이 되었다. 같은 양철지붕으로 이어진 자그마한 방 2개. 너는 우리가 만난 것이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그곳은 가난해도 치열하게 살 각오를 한 자들만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무서운 게 돈밖에 없었으니, 필연적으로 만날 운명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서울살이는 선배였다. 인사차 음료 세트를 들고 찾아갔더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문틈 사이로 보였다.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를 예상했더니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그것도 이 가난한 동네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이 기이한 장면을 난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연주가 끝나 무심결에 박수를 쳤더니, 그녀는 사람에게 모습을 들킨 길고양이처럼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경찰에 신고할 거에요!”


“자, 잠깐만요. 오늘 아침에 이사 온 사람입니다. 인사차 들렀을 뿐이에요. 집주인께서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나요?”



당황해 손짓∙발짓으로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긴장을 풀고는 현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경계는 풀지 않은 채로 내 쪽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런 말을 듣기는 했죠. 하지만 남자라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큰일 났다고 생각하며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한숨 쉬며 “뭔가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네요”하고 말하며 내 손에서 주스 선물 세트를 받아 들었다.



“무거워요! 제가 들게요.”



“바이올린도 몇 시간씩 연주할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시길.”



‘하하’하고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녀가 호쾌하게 박스를 뜯어 오렌지 맛 주스를 하나 건넸다.



"김성아라고 해요. ‘별 성’자에 ‘나 아’자. 나이는 22살.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우리는 상반된 시간을 살았다. 6교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 즈음 네가 바이올린을 챙겨 나갔고, 이른 새벽 네가 방으로 들어가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가벼운 묵례 정도만 주고받았음에도,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동안 너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네가 음악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사실, 낮보다는 밤무대에 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그리고 보기보다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는 사실. 신호등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너의 겉모습에서 나는 너의 희로애락을 읽어낼 수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노란색, 차분하거나 우울할 때는 파란색이나 남색, 그리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날 때는 붉은색. 온몸을 붉게 치장한 날에는 너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실도 온몸으로 배웠다.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이었다. 밤을 지새우며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방에서 기절해 있는데, 옆방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잠 좀 자자’고 말하려고 방을 찾아갔더니, 그녀가 붉은 원피스를 입은 채 격렬하게 현을 움직이고 있었다. ‘건드리면 죽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울먹이는 소리가 울부짖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와 엉켜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우울할 때는 푸른색인데,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당장 그녀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 노래가 끝날 무렵 냉장고에 고이 아껴 두었던 맥주 몇 캔과 마른안주를 그녀의 방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 잠을 좀 잘 수 있겠지, 하고 돌아와 이불을 깔고 누우려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샤워한 직후였는지, 그녀가 머리를 덜 말린 채로 맥주 두 캔을 양손에 들고 서 있었다. 하얀 티셔츠에 짧은 청바지, 다행히 조금은 진정된 모양이었다.



“이만큼 못 마셔요. 그러니까 어울려주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결과니까, 제대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겠지.



우리는 서로의 인생사를 안주 삼아 마셨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맥주 두 캔을 따서 건배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불러내긴 했는데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고, 나는 숫기가 없었다. 용기 내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왔어요?”


“작년 이맘때? 지방에서는 음악 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서울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어요.”


“아 그럼 밤마다 나가시는 게 공연 때문인 거였어요?”


“네. 뭐, 오늘 자로 백수가 되어버렸지만.”



조금 전의 연주는 그것 때문이었구나.



“왜 잘렸는데요?”



“말하자면 긴데요,” 하고 그녀는 말하기 시작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당일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간중간 피곤해서 졸기도 했고,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강의 사정은 이러했다: 지방의 명문 예고를 나온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했지만, 고2때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음대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바이올린 강사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려고 했으나 지방에는 수요가 없었고, 서울에는 화려한 학력과 이력의 강사들이 즐비했다.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근처의 재즈바에서 손님들에게 신청받아 연주를 해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제 연주를 하고 있는데 만취한 미친놈이, 아니 손님이 마시던 술을 갑자기 뿌리지 뭐예요. 제 바이올린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데, 젖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래서 저도 화나서 막말 좀 했어요. 그랬더니 오후에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그건 화날 만 하셨네요. 저라면 도로 뭔가를 뿌려줬을 텐데.”



“이렇게 말인가요?”하고 그녀는 옆에 있던 물잔을 들어 물을 마당에 세차게 흩뿌렸다. “네, 그렇게요.”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내 물잔을 들어 마당에 뿌렸다. 얼룩덜룩한 마당을 바라보며 우리는 큰 소리로 웃었다. 개나리처럼 화사한, 노란빛의 함박웃음이었다.




프로필 이미지 출처: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127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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