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해고기념 술자리를 계기로, 우리는 겨우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겨울은 가난한 이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계절이었다. 온종일 기온이 영하를 맴도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칼바람이 일 때마다 살을 찢는 듯한 추위가 해진 점퍼의 틈새로 부지런히 새어 들어왔다. 게다가 판자촌에서의 일상은 생활이 아닌 생존에 가까웠다. 수도관이 동파된 탓에 제대로 씻지 못해, 대학에 마련된 샤워실을 쓰려고 이른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갔다. 온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한겨울에 폭포 수련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목욕탕에 생활비를 탕진해 라면으로 연명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난방도 문제였다. 고향에서는 불고기 구워 먹을 때나 쓰던 연탄으로 방을 데웠는데, 매번 가는 게 번거로운 데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될 위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난방비를 감당할 수 없어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 10시까지 반강제로 남아 공부를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언덕을 올라 녹슨 철문을 열면, 언제나 그녀가 출근 전에 나의 방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연탄난로가 내 방에 가까우니 연탄을 때면 내 방이 훨씬 따뜻하다’는 그녀의 주장에 반박할 힘도 없었고 하루 중 추위가 절정일 때 출근하는 것이 안쓰럽기도 해서 그냥 두었다. 그렇게 며칠을 그냥 두었더니, 아예 내가 새벽에 학교로 떠날 무렵에 퇴근해 자기 방에 짐만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난로의 온기가 남아있는 동안 방 안에서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남의 방에, 그것도 남자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자도 돼요? 성아씨가 무슨 길고양이도 아니고.”
“매일 거지꼴로 학교 가면서 남자로 보일 거로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네요. 게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잠깐 신세 좀 지겠다는 건데, 이러는 편이 절약도 되고 친환경적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저한테 좋은 게 아니잖아요. 연탄값도 제가 대는데. 게다가 프라이버시 문제도…….”
“연탄값이야 제가 반을 부담하던지, 대신 뭔가를 드리면 되죠. 그리고 제 방도 마음대로 들어오셔도 상관없어요. 값비싼 것도 없으니. 아니면, 설마 그 나이에 여자 방에 들어가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죠?”
“하, 참, 기가 막히네. 그러면 제 방에 묵으시는 값 제대로 받아낼 테니까 각오하세요.”
한순간 열 받아서 방에 멋대로 묵는 것에 대한 숙박비를 받아내겠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과외 숫자가 늘어 생활비도 크게 곤란하지 않았고, 그녀가 방을 미리 데워 놓아 집에 돌아오자 마자 바로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게다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랍시고 그녀의 방에 멋대로 들어가 헤집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흥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경찰에 신고당할 여지를 주는 것은 사절이니까.
고민 끝에, 나는 그녀에게 ‘내가 원할 때, 자그마한 콘서트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특별히 연주해줬으면 하는 곡 같은 거 있어요?”
“저는 음악에 대해 잘 모르니까, 프로한테 맡길게요. 아, 기왕이면 겨울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이었으면 좋겠네요.”
“겨울과 관련된 곡이라, 그러니까 쓸쓸하고 우울한 걸 원하시는 거죠? 딱 봐도 연말을 혼자 보내실 것 같은데.”
“어이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저 인기 많아요. 애들도, 학부모님들도 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또래 여자는요? 그쪽이 여자랑 단둘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에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정떨어지게 만들 것도 아니고.”
“그냥 여자친구 없으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거짓말해봐야 구차해질 뿐이라구요.”
“저 12월 31일에 약속 있어요. 그래서 외박할 거니까, 혼자 쓸쓸하게 제 방 쓰셔도 됩니다.”
“저도 약속 있거든요? 지인 부탁으로 오케스트라 특별공연 대타 뛰기로 했어요. 끝나고 다른 단원분들과 신년 파티할 거예요.”
“아 그러세요? 그럼 우리는 새해에나 얼굴을 보겠네요.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쪽도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고는, 둘 다 웃음이 터졌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신경림 시인이 그랬던가. 어쩌면 우리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쿡, 쿡, 상대방을 딱 간지러울 정도로만 찔러보며 위안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곁에는 네가 있고, 네 곁에는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텅 빈 겨울이 조금은 따스함으로 차오른 것 같았으니까.
12월 31일, 이른 아침부터 그녀는 집을 나섰다. 대타로 투입되는 것이니 빨리 가서 몇번이고 리허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하는 만큼 졸릴 법도 한데, 간만의 정식 공연이라서 그런지 피곤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베이지 코트에 검은 드레스, 그리고 아끼는 다이아몬드 귀걸이. 노란 드레스를 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세간의 드레스 코드를 따를 정도로, 그녀에게 이번 무대는 각별한 모양이었다. “잘 할 거예요.” 행운을 빌어주고, 나 역시 외박하기 위해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다만, 그녀처럼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해가 되고서야 돌아올 거라고 호언장담해버렸으니, 뱉은 말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설마 도서관이 평소보다 빨리 닫을 줄이야. 학교의 24시간 열람실에서 빌린 책들을 읽으며 밤을 새울 생각이었는데. 낭패였다. 다음 날까지 머무를 곳을 급히 찾아보았다. 하지만 인근의 PC방이나 만화방은 죄다 만석이었고,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평소보다 2~3배 비싼 대학가의 모텔방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새해에나 돌아온다고 했으니, 새벽까지 술을 마셔서 일찍 돌아왔다고 둘러대면 괜찮겠지.’
설령 밖에서 얼어 죽더라도, 방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돌아섰어야 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샛노란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귤을 까먹고 있었다.
“내 귤! 아니, 그것보다 왜 여기 계세요? 연말 파티는요?”
“그냥 1차까지만 있다가 왔어요. 아무래도 대타로 간 거다 보니까 어울리기 힘들어서. 그쪽은 왜 벌써 왔어요? 차였어요?”
“아니 뭘 차여요, 차이기는.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그것보다 제 귤 왜 마음대로 드세요!?”
“귤 몇 개 먹었다고 되게 뭐라 하시네. 제 방에 과자 좀 있으니까, 그거랑 물물교환하는 걸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