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거리 로맨스
“모처럼 둘이 시간이 맞았으니 전에 부탁하셨던 콘서트, 열어드릴까 하는데 괜찮아요?”
“네? 지금요? 저야 좋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주만 하다 오셨는데 몸이 버티겠어요?”
“저는 복학생 아저씨랑 다르게 아직 파릇파릇하거든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한껏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가지러 방으로 떠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확인해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즈음, 그녀가 돌아왔다. 아침에 봤던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는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영광인데요?”
“비꼬는 거예요?” 살짝 토라진 투로 그녀가 물어왔다.
“영광이에요, 진심으로.”
의외였다. 단 한 명뿐인 관객을 위해 이 정도까지 진지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나의 솔직한 반응이 그녀에게는 반대로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시작하겠다고 말한 뒤 바이올린을 턱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긴 심호흡에 맞춰 천천히, 활을 현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이기적인 연주였다. 콘서트에 가보기는커녕, 클래식조차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어본 게 전부인데, 그녀의 선곡들은 처음 듣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이 무심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날 배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있는 힘껏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 전부인데도, 어느새 온몸의 감각이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쫓고 있었다. 때론 울부짖는 듯이 날카롭게, 때론 어루만지는 듯이 부드럽게,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담아낸 연주가 방안에 흘러넘쳤다. 그러다 좁은 무대가 답답했는지, 그녀는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관객이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그녀는 무희처럼 자신의 선율에 취해 그녀의 분신과 춤을 추었다. 섬세한 왈츠, 격정적인 탱고, 그리고 멎은 채 클라이맥스. 시간이 흘러 당시의 곡들도 작곡가들도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마지막 연주가 드뷔시의 ‘달빛’이었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우연히 달밤에 들은 것이 마음에 들어 수십 번은 더 들은, 그래서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클래식. 비록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정말 좋아하는 곡이라고 술김에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곡이 왜 그렇게 마음에 드는데요?”
“달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요.”
한 줌의 불빛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연말의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그녀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에 한 줄기 달빛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연주에 호응하듯 함박눈이 찾아와, 칠흑 같은 드레스 위로 부서지며 별처럼 새하얀 빛을 뿜었다. 밤하늘을 통째로 펼쳐 보이는, 사치스러운 무대였다.
그날 나의 보잘것없던 삶은 그녀 덕에 예술이 되었고, 나는 한없이 선명하고 찬란한 그녀의 밤을 아로새기다 눈이 멀어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말버릇처럼, 이렇게 되뇌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부디, 나의 낮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밤이 영원하길.
소원은 이루어졌다. 야속하게도 가장 뒤틀린 방식으로.
해가 바뀌면서 우리의 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나의 그녀와의 관계’였다. 성아는 여전히 내 방을 자기 방 드나들다시피 하며 쟁여 놓은 주전부리를 찾아 먹었고, 이 집 서비스가 좋으니 또 오겠다며 능청스럽게 웃어넘겼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내 간식, 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말라며 투덜대면서도, 늘 과자와 과일을 찾기 쉬운 곳에 숨겨놓았다. 일전의 공연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심 끝에 준비한 이벤트였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제일 쉬운 보물 찾기라면 킥킥대는 성아에게, 괜히 찔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물을 숨기는 것만큼이나 호감을 숨기는 것도 서툰, 미숙한 청춘이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그녀를 향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만 갔다. 전례 없는 폭설로 온 서울이 하얗게 잠겨버린 어느 겨울밤, 나는 찌그러진 자전거를 끌고 눈길을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었다. 추우니 빨리 돌아가겠다며 무리하다 여러 번 미끄러진 탓이었다. 판자촌의 초입에 들어섰을 무렵에는 온몸이 녹초였다. 눈 덮인 언덕을 올라갈 생각을 하며 상심에 빠져있을 때, 선명한 발자국들과 자동차 바큇자국이 새하얀 풍경 위를 어지러이 수놓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도 흔적을 남기며 언덕을 올랐다. 한 발, 한 발, 그러다 행렬이 멎은 곳은 우리 집 철문 앞이었다. 이웃 주민들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요?"
"아이고, 그, 그게 글쎄……."
옆집 아주머니가 허둥대는 사이, 잠시만 지나가겠다는 말과 함께 구급 대원들이 철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흰 천으로 덮인 들 것이 뒤따랐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성아였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평소처럼 내 방으로 건너와 시간을 보내다, 날씨가 여느 때보다 추워 창문을 닫은 것이 화근이었다고 했다. 사망 추정 시간은 저녁 9시, 보통 때라면 내가 진작에 돌아와있을 시간이었다. 발견 당시 성아는 연탄난로 옆에 웅크린 채로 잠들어있었다고 했다. 기다린 게,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럴 순 없었다. 거짓말이었다. 왜 하필 그날 폭설이 내려서, 돈을 아끼겠답시고 눈길에 자전거를 타서, 그렇게 넘어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질질 끌고 언덕을 올라서……. 나를, 가난을, 시궁창 같은 현실을, 그녀의 죽음을 방관한 신을 탓하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죽어야지, 내가 죽어서 속죄해야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서강대교에서 뛰어내리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리가 고꾸라져 쓰러졌다.
"이 한심한 총각아, 어딜 죽겠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 상갓집에서 그만 난동 피우고 이거나 받아. 성아 학생 방 정리하다 나왔는데, 자네가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연락을 받고 뒤늦게 조문을 온 집주인 할머니가 검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성아가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던, 그녀의 바이올린.
“이걸, 왜 제게……”
해진 케이스를 열어보니, 그녀의 낡은 바이올린과 활, 그리고 한 권의 노트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일기장이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상경한 이후의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런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제발 바퀴벌레라도 나오지 않기를.'
'생활비가 다 떨어졌다. 빨리 알바 구해야 해. 프로가 돼야 하는데, 일하다 손을 다치면 어떡하지.'
'바텐더 언니가 바이올린 연주를 해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았다. 재즈는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을까?'
'재즈 바에서 연주를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비록 무대는 작지만 좋은 경험이 됐으면.'
'옆방에 웬 남자가 새로 들어왔다. 아무런 관계없는 남녀가 동거라니, 있을 수 없어. 집주인한테 따졌는데 싫으면 나가라고 했다. 에휴, 돈 없으니까 참아야지.'
'보기보다 센스 있는 사람이었다. 술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갖다 줬을까. 혼자 먹긴 그래서 같이 먹자고 말을 걸었는데, 이곳에 올라와 처음으로 즐겁게 대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추워져서 그런지 조금 쓸쓸하네. 이럴 때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12월 31일에 약속이 있다 그랬다. 공연 끝나고 바로 돌아와서 함께 연말 보내자고 하려 했는데, 애인이 있는 걸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 자신도 놀랬지만, 연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어 다행이다.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하겠다.'
'방에 내 맘대로 놀러 가는 게 민폐려나. 그래도 놀리는 게 재미있는 걸 어떡해.'
그리고 노트의 마지막 장에 적힌 그녀의 말 앞에서, 나는 결국 슬픔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언젠가, 당신의 달밤을 비춰줄 별이 될 수 있기를.'
그로부터 벌써 수년이 흘렀다. 우리가 살던 달동네는 재개발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가난에 쫓긴 이웃들은 입주권과 바꾼 돈다발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하나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중장비 떼에 의해 시내에 가까운 집들부터 힘없이 바스러졌고, 언덕 꼭대기 부근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우리의 집도 끝내 사라져버렸다. 네가 연주했다는 이유만으로 단골이 되었던 재즈 바도 사정이 어려워져 문을 닫았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해 줄 공간도 사람도 없어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떠났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남들보다 해가 더 빨리 지고, 빨리 뜨는 곳이었다. 이제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곳곳에 놓인 가로등이 길목을 환히 밝힌다. 저녁 무렵이 되면 지하상가에서 장을 보고 온 가족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웃집에서 밥 짓는 냄새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은은히 퍼진다. 한때는 다 쓰러져갈 듯한 판자촌이었던 우리의 보금자리는 이제 없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높은 곳에서 창밖으로 강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와 함께 바라보던 서울의 화려한 일면이 매일 밤 펼쳐진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자리할 때마다,
나는 너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나의 낮보다 아름다운
너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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