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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추욱 처질 때

들깨죽

by 아동


유독 힘이 드는 날 있다.

발바닥이 쩍쩍 갈라져 불이 펄펄 난다. 종아리를 타고 찌릿하게 전기가 올라와 허리에 멈춰 선다. '허리 끊어질 것 같다.'표현은 좀 모자란다. 으슬으슬 몸은 춥고 축 늘어져 바닥에 붙은 껌처럼 늘어진다.

깔깔한 입으론 물 한 모금도 못 넘긴다.

감기몸살이 들면 만사 귀찮다.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하물며 생각하는 것조차 어렵다. 끝끝내 이불 쓰고 눕는다.




죽 좋아해 한때 ‘죽순이’라 불리기도 했다. ‘죽치다’라는 말이 움직임 없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는 걸 보면 죽은 본래 걸쭉하고 진득한 것 인가보다.


시어른은 가끔, ‘시어머니 삐졌다. 호박죽 끓여라.’라고 했다. 화가 나 입을 삐죽 대다가도 달콤한 호박죽 한 그릇이면 기분 전환이 되기에 그리 말하나 보다.

요즘은 뉴질랜드산 단호박이 많이 나온다. 정말 달콤하니 맛나다. 설탕 넣지 않고도 따라갈 재료가 없다.

그래도 최고의 재료는 한겨울을 나고도 윗목 한 자리 차지하던 늙은 호박이다. 단 맛은 좀 덜해도 호박 그 특유의 맛이 있다. 시어른은 '당원'이라는 조미료를 넣어 달큰한 맛을 더하기도 한다. 그 맛도 그 맛 나름대로 은근 매력이 있다.

달콤함 뿐 아니라 몽글몽글하게 빚은 새알심 하나 둘 넣어 주면 쫄깃함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영양도 만점이라 사시사철 즐기는 죽이다.

전복죽은 황제죽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전복을 깨끗이 씻고 입부분을 떼어낸다. 숟가락 하나 들어 전복을 떼어 낸다. 들기름 넣고 얇게 채 썬 전복을 불린 쌀과 함께 잘 볶아 준다. 뜨겁게 끓인 물을 넣고 바글바글 쎈 불에 끓여준다. 한소끔 끓어가는 죽은 약불로 줄여 뭉근하게 끓인다. 중간중간 바닥이 눌지 않게 잘 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후후 불어 쫄깃한 전복과 함께 먹으면 세상 속 든든한 포만감은 내 편이 된다.




온몸이 방망이질을 당한 듯 바닥으로 축 처지면 들깨죽 한 그릇 먹는다.

들깨죽은 바쁠 때 빨리 끓여 낼 수도 있고 속 편히 먹을 수 있는 죽 중에 하나다. 꼭 불린 살이 아니어도 된다. 식은 밥 한 덩이 넣고 푹 끓여 쌀알이 통통하게 불도록 끓고 나면 들깨가루를 살살 풀어낸다.

호박죽이나 전복죽처럼 재료를 처음부터 넣어 끓이진 않는다. 다 끓고 나면 마지막에 들깻가루 넣고 살짝 끓여 내야 들깨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추어탕이나 어탕을 먹을 때도 산초나 제피를 넣고 가장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넣어 먹는다.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위해 주인공으로 아껴두는 것이 들깨가루다.


죽은 푹푹 떠먹는 밥처럼 먹을 수가 없다. 뜨거운 죽 한 숟가락 입안 가득 넣으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뜨겁다. 가끔 입 한가득 넣었다 바로 후진해 죽그릇으로 직행하기도 한다. 입천장은 데어 다 까진다. 그래서 죽 먹을 때는 윗부분부터 살살 긁어 후~후~ 불어 먹는다. 싱거우면 국간장에 들기름을 넣어 살짝 찍어 먹는다.

깍두기나 김치 없이 순하게 먹을 수 있다.




몸살은 몸을 쉬게 하라는 '가볍고도 묵직한 휴식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입맛 없고 머리는 아프며 힘이 쭉 빠진다. 따끈한 국물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굵게 채 썬 무를 살짝 볶다 멸치육수를 넣고 끓이고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풀어준다. 역시 들깨죽에 버금가는 몸살 전용 들깨국 한 그릇도 차가운 몸을 데워 준다.

들깨죽을 먹을 때면 이렇게 구수하고 고운 들깨가루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의 손길이 있었나.'를 생각한다.

한여름 땡볕을 견디고 가뭄에는 물을 폭우에는 고랑으로 물을 빼주며 정성과 품 들여야 들깨가 큰다. 열매 맺기 전 푸릇푸릇한 들깻잎은 삼겹살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푹 삶아 물기 빼고 한 장 한 장 양념장으로 정성을 쌓는다. 열매 맺은 들깨는 기어이 타작을 해야 손에 들어온다. 말리고 타작하고 키질해서 쭉정이와 껍데기는 날려 보낸다. "잘 가라. 다음엔 여문 열매로 다시 오렴. 그간 열매를 안아줘서 고마웠다."


볕 좋을 때 잘 말리고 빻아 가루가 된다. 걸쭉한 국물 요리를 위한 최고의 식재료는 최고의 정성 덕분에 탄생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내겐, 국물 없이 뻑뻑한 들깨죽은 아픈 몸과 상한 마음을 한 번에 위로하고 다독여준다.

죽 한 그릇이 무슨 위로가 되겠냐 싶겠지만, 구수함과 뜨끈함이 주는 안정감이 그저 좋다.


순하고 착한 음식. 내겐 들깨죽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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