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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욱 Jun 14. 2020

[디지털 시대의 사후세계]
무엇을 남겨야하나?  

디지털 시대의 사후세계 서평

디지털 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해서 책을 읽기 전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친한 친구의 학교 프로젝트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프로젝트의 주제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 고민했었고 나에게 조언을 구해왔다. 막상 하고 싶은 주제를 하라고 하니 황당한 상황에서 나는 여러 가지 주제들을 던져줬다. 통일 관련 탈북민이라든지 문화체 엄이라든지 그런 디자인은 어때?, 밀렵꾼을 줄이는 건?, 아니면...

노트를 펼쳐 여러 가지 주제들을 주었다.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근본적으로 깊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너의 경험에서 찾는 주제가 가장 좋은 주제라 이야기해줬다. 그때 당시 내가 하는 프로젝트는 물리학과 디자인을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물리학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고등학교 때 이과였기 때문이다. 시각디자인에 이과 그리고 어울리지 않을 법한 물리를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의 자서전을 읽으니 내 생각과 매우 일치했다. 직감적으로 느낀 건 이 세상에서 나만이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디자인이 나오겠다고 직감했다. 무엇보다 고객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디자이너의 시장조사 또한 정말 밝았다. 실제로는 현재 교수님의 반대와 개인적 실력, 태도 문제로 중단된 상태다. 그래서 뭐,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찾는다면 이 세상에서 너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디자인이 나올 것이라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사별 경험이 있던 그 친구가 선택한 주제가 디지털 시대의 사후세계다. 

내가 가장 이해를 잘할 수 있고 경험해봤으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찾았다. 나와 그 친구는 항상 교수님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상업적이지 못하는 이유로 그건 디자인이 아니라고도 이야기했다. 물리로 가니 물리 대중화 같은 거 말고 헬스케어로 상업을 바라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쩃든 너 같은 꼴통은 처음 본다는 이야기들과 함께 중단되었고 그 친구는 이 작업을 완성시킨 것 같더라.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디지털 세계 죽음에 대한 민감함과 둔감함

SNS를 사용하는 젊은 층 죽음에 대해 둔감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뇌과학적으로도 도파민이 주된 호르몬으로 작용하는 시기이기에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젊은 사람은 없다. 도전하고 열정적인 나이 때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감해지는 경우는 주변에 누군가가 죽음을 겪은 경우다. 젊은 층이 죽음에 대한 경험은 강렬하게 다가오고 그 대상이 가족일수록 크다. 둔감함에서 민감함으로 간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디지털 시대의 사후세계에서 벌어지는 수십 가지 사례들이며 사이사이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실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죽음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가족과 잊고 싶어 하는 가족, 죽은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는 실수를 저질러 타인이 충격을 받는다거나, 불쾌하며 유쾌한 자료를 접한다거나, 애도의 단계는 무의미 한경우도 있으며 소셜미디어는 마치 중간계처럼 지구와 천국을 연결시키는 징검다리라는 이야기들, 죽은 사람을 미화시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에서 애도하는 것도 트렌드처럼 1년간 반짝 추모를 하다 사라진 사람들 그 속에서 자라나는 괜한 서운함.


실제로 죽음이라는 것을 콘텐츠로 만든다는 것은 정말 민감한 문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에 그만 놓아주어야 하는 게 답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때론 추모와 애도를 하면서 그들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도 하지만 때론 잊고 싶어 하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들을 대상으로 만든 콘텐츠로 돈을 번다는 것 또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과연 사별을 겪는 건강한 슬픔이란 무엇이란 말일까? 심지어 죽은 뒤를 디자인하는 퍼스널 브랜딩이 나올 정도로 죽은 뒤의 세상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죽은 뒤 만들어지는 프로파일은 자서전 식이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낸 전기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죽음을 알고 있다면 자서전을 쓰겠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기식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세상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것일까? 산 사람이라야 죽은 사람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다곤 하지만 단순히 이름을 남기고 영향을 주기 위해서 나 스스로 남아 있고 싶어 함을 표출하는 것이 맞을까?? 죽은 뒤에도 마케팅과 포장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역사에 이름 한자 긋고 싶어 함은 죽은 뒤의 브이로그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살아생전의 업적일 텐데, 페이스북에 애도 또한 1년을 넘기지 않았던 것처럼 죽은 사람은 잊힌다. 기록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영향력 있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남은 가족을 위해서 일까, 아니면 내가 부모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까?



당신이 인터넷에 남긴 자아상, 그리고 추모

환영받지 못하는 고인이 되지 말 것.

죽은 뒤 모습은 인터넷에 남긴 자아상의 조합이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강렬히 도입해볼 만한 시스템이 떠올랐다. 악플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 유튜브, 인터넷 기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단다. 그리고 때로는 그 댓글은 당사자에게 상처가 되고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것은 비단 연예인만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 모두 악플에 시달린다. 만약 그 악플을 다는 사람이 악플을 달기 전 생각을 한번 더 할 수 있는 넛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것이 디지털 세계의 사후세계, 인터넷에 남긴 당신의 자아상으로 상기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수많은 댓글들은 당신이 죽은 뒤 불명예로 남고 부끄러운 과거로 보여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트위터든 유튜브든 댓글이 가진 자신의 섬뜩한 행동들임을 안다면,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공개될 수 있을 만큼 부끄러운 일임을 지각한다면 좀 더 클린 한 제2의 자아상이 된다. 당신이 당장 내일 죽어도 부끄럽지 않을 댓글 문화 그것이 어쩌면 디지털 세계의 사후세계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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