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에 대하여
당신의 점수판은 무엇으로 기록되는가?
지난달, <에고라는 적> 책을 읽고 많은 부분에서 깊은 생각들을 했다. 나중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몇 군데 표시해두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아래의 내용이었다. 해당 내용의 주제와 별개로 어떤 문장이나 내용을 접했을 때, 깨달을 수 있는 자유와 시공간을 넘나들며 반성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주제와의 매칭여부를 떠나 나는 '완벽주의'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미국 농구계에서 신화적인 존재인 존 우든의 점수판은 자기 팀의 승패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점수 그 자체는 '승리'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위대한 야구 선수이자 미식축구 선수였던 보 잭슨은 홈런을 치거나 터치다운을 했을 때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것을 완벽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위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성공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가 정한 기준을 충족시켰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신경을 쓴다.
...
어떻게 하면 그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고민했다. 바로 이것이 조직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전문가적인 차원에서나 겸손함을 더 강력한 힘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다만 이 과정은 때로 자기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또 개선될 수 있다.
...
우리의 점수판은 하나가 아니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도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면의 점수판과 외면의 점수판을 구분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당신이 발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최고 수준의 능력, 당신은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스스로를 평가해야 한다. 단지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연히 운이 좋아서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멍청해서 그럴 수도 있다. 누구나 승리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있지는 않다.
- < 에고라는 적 > p264 -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벽 추구에 대한 노력이 한참 부족해 보이지만 말이다. 왜 완벽주의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긴 어렵다. 유전인지, 가정환경의 영향인지, 외부의 어떤 자극 때문인지 잘 모른다. 그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해본다. 항상 잘하는 것보다는 못하는 것에 집중해 '너는 왜 이것도 못하냐', '너는 왜 이런 것도 모르냐'와 같은 비난을 더 받은 것 같다. 칭찬보다 비난에 취약했던 나는 모두 다 잘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초등학생 시절 수학 시험에서 1등을 해도 단순 사칙연산 실수로 한 문제를 틀려 오점을 남긴 자신에게 채찍질을 했었다. 나는 한 개를 틀려서 슬픈데, 친구들은 내가 1등을 했으면 됐지 그깟 하나 틀렸다고 징징대냐고 못마땅해했다. 남과 나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누군가 가르쳐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한 이력서에 자신 있게 장점으로 '완벽주의'를 어필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완벽주의가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나 사회적으로나 회의적인 분위기가 일었다. 경력을 쌓고 생각이 다양해지면서, 업데이트된 나의 자소서에는 '완벽주의'가 단점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것은 장점인지 단점인지 판단하기도 애매한 요소다. 말장난 같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모든 성격은 양날의 검이다. 손바닥 뒤집듯 장점을 뒤집어 극단으로 내몰면, 그것은 분명 단점이 된다. 반대로 단점은 곧 장점이 될 수 있다. 내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게을러터짐'과 '귀차니즘' 세포를 극단으로 밀어내면, 내 일을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바꾸도록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점으로 둔갑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완벽주의를 잠시 내려놓고, 나만의 강점에 집중하는 시기를 가져보았다.
나의 모토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한 뒤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를 10대 때부터 유지하다가, 10여 년이 흐른 뒤 과감히 던지고 새로운 모토를 정신줄에 장착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 방향을 잡지 못했던 내 인생에 무작정 최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생각을 한 곳으로 모으고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게 중요했기에 모토를 바꾸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완벽주의자들의 성격이 동일하진 않겠지만, 나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완벽함에서 벗어나는 결과가 뻔히 예측이 될 때 허무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 허무감은 회의감을 먼저 불러오기에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는 오류에 빠진다. 즉, 예를 들면 내가 포토샵이라고 하는 툴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결과가 어차피 디자이너들 만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게 예측이 되면, 애초에 시작 자체를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작'을 잘 못하는 사람, '시도'하기를 주저하는 사람, '처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잠시 완벽주의를 내려놓은 요 몇 년간 어설픈 시도를 하나, 둘씩 실행하게 된 것이다. 실행을 하고 보니 내면에 내재되어 있던 완벽주의 성향이 다시 나를 앞으로 달리게 밀어붙였다. 워워~워~~ 진정하자. 그렇게 일단 시도를 해서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작은 성취를 일구어 내는 것과 완벽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욕구 사이에서 항상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에고라는 적>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완벽 DNA에 대해 깊은 고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마인드가 결코 잘못되거나 허황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위로를 받았다.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쿨한 마인드로 살아보면서, 완벽함을 추구했을 때와 추구하지 않았을 때의 서로 다른 장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책을 읽으며 예전의 나를 회상하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결코 과거와 동일한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내 실수를 찾으려 할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다.
당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되돌아볼 때,
나는 그 행위에서 오로지 위험만을 볼 뿐이다.
-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
나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뇌 속 자동 '복기'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일은 상관없지만, 실수나 실패를 한 경험을 했을 때, 바둑에서의 복기처럼 내가 실수했던 말과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복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면 줄곧 '왜 그랬을까' 혹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라는 결과로 수렴된다. 물론 '다음번에는 이렇게 해야지'라는 자기반성의 효과는 분명히 있지만 그 과정은 지옥과도 같다. 그리고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너무 자연스럽게 뇌가 복기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 같아 내 감정이 너무 버겁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은 실수를 찾으려 할 때만 뒤돌아본다고 하다니.. 내가 얼마나 감정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그로 인해 스스로 얼마나 힘들게 만들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봤다.
어쩌면 완벽에 대한 기준도,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압박감도,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들어낸 점수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외면의 점수판에 휘둘릴 필요도,
내면의 점수판에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완벽주의 자체가 아니라,
완벽주의에 대한 내 관점과 신념의 부재와,
완벽주의에 대한 내 이성과 감정의 불균형이
초래한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자기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과거와 현재의 내 생각을 마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