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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Jun 04. 2020

가장 좋아하는 것의 의미

그림을 그리다 #3 사랑의 불시착

나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 아니다. 대부분 다 좋게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어떤 분야든 가장 좋아하는 것을 물으면 답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런 나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있긴 했다. 단지 그런 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을 뿐.


가장 친한 친구, 가장 좋아하는 물건, 가장 좋아하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음식, 가장 좋아하는 책, 가장 좋아하는 영화 등... 반대로 가장 싫어하는 것도 역시 매우 적었다. 마치 정규분포 종 모양의 그래프를 그리면 항상 양 끝단으로 들어가는 2.5% 정도씩으로 이야기하면 얼추 맞을 듯싶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열두 살에 본 <당신이 잠든 사이에>라는 미국 영화.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열여섯 살에 읽은 <제인 에어>, 지금은 내용이 가물가물.

가장 좋아하는 친구나 지인은 거의 손에 꼽고,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지금까지 약 200병 정도 넘게 먹어본 것 같지만 딱히 선택하기 어렵다. 가벼운 아포틱 시리즈(미국)나, 그라함 토니 와인 30년 산(포르투갈) 정도?



인생 최초 연예인 펜그림 :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윤세리(손예진)와 리정혁(현빈)


몇 달 전에 tvN 채널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방송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난 3월 말에나 되어서야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저 우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은 바로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은 손예진이다. 손예진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대부분 챙겨보았다. TV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던 최근 몇 년간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의도적으로 시청하지 않았다. 지난겨울 내내 넷플릭스를 켤 때마다 매번 손예진 얼굴과 함께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가 떡 하니 첫 화면에서 나를 유혹했다. 그러던 3월의 어느 날, 밥 먹으면서 한 번 보려고 결국 틀어버렸다. 남들이 떠들썩하게 이 드라마 이야기할 때는 거들떠도 안 봤는데, 드라마가 종영한 후에야 뒷북을 치게 된 것이다.


1회를 보고 딱 한 마디가 나왔다. "이게 뭐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접한 이 드라마. 재벌 딸이 북한으로의 불시착이라니! 너무 허무맹랑한 이 이야기의 시작을 보고 적지 않게 실망했다. 그저 기대와 너무나 달랐던 생뚱맞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 스토리에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져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튿날, 2회를 보기 위해 리모콘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랑의 불시착>의 정주행이. 그리고 1주일이 되기 전에 완주했다. 새벽에도 몇 편씩 잠도 안 자면서 말이다. 잠보다 드라마의 스토리가 너무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 폐인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내가 좋아하는 장르, 로맨틱 코미디.

하나같이 매력을 뽐내는 모든 조연들과 환상적인 연기력.

연출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디테일.

웃음과 진지함을 넘나드는 자연스러움.

가장 뻔하고 지루하기 쉬운 '마지막회'의 느리지 않은 전개.

드라마 전체 흐름을 이끄는 스토리의 방향과 자잘한 에피소드의 연결성.


드라마가 가질 수밖에 없는 뻔한 요소와 픽션 특유의 비현실성을 차치하니, 결국 <사랑의 불시착>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인생 두번째 연예인 펜그림 :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윤세리(손예진)와 리정혁(현빈)


한창 펜그림을 그릴 때, 인물을 잘 안 그리는 내가 펜 하나로 연예인 그리기에 도전했다. 인물화는 잘 그리지 않는 편이다. 인물화는 정물화나 풍경화에 비해 그리기가 훨씬 어렵다.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현존하는 실체를 보고 그리는 일은 그와 최대한 똑같이, 유사하게 그리지 않으면 그 느낌이 살지 않기 때문에 그리기가 어렵다. 사물이나 풍경은 살짝 그림이 왜곡되어도 우리의 뇌가 어느 정도의 범주 안에 드는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인물은 정말 얄짤없다. 인물은 약간만이라도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둔갑해 버린다. 사람의 얼굴과 몸, 형상은 고유하기 때문에 그와 거의 유사하게 그리지 않으면 그냥 새 사람으로 탄생해 버린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그리는 것보다 실제 사람을 보고 그리는 일은, 곡선의 경계를 그려내는 방식, 명암과 그림자 등 신경 쓸 부분이 훨씬 더 디테일해진다. 그렇게도 드라마가 좋았던 건지, 무슨 깡이었는지 원... 윤세리와 리정혁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평양으로 가는 두 사람. 첫 작품은 작은 종이에 그리는데 얼굴도 작아 디테일에서 망쳐버렸다. 그래서 재도전! 두 번째 그림은 큰 이미지로 골라 그렸다.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한 짧은 선 전략으로 처음과는 약간 다르게 시도했다. 펜은 연필과 달라 실수로 잉크가 묻으면 그걸로 그냥 끝이다. 두 번째 경우, 인물을 크게 그리니 실수가 발생해도 보정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있어서 다행이었다. 둘 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지만, 첫 연예인 펜드로잉 치고는 나름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기는 일은, 그리 흔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책, 물건, 장소, 기억... 을 떠올려 보면, 그 순간에 남겨진 어떤 '감정'이 있었다.

내겐 '애틋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름의 철학이나 의미가 담긴 순간일수록, 내게 더 큰 충격으로 남는 것 같다. 그것이 좋은 충격이든, 색다른 충격이든.


최근에 본 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헛헛해진 내 마음을 미소로 가득 채워주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가 내게로 온다는 것은 어쩌면 그저 세렌디피티, 우연한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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