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이제 막 일곱살이 된 아이가 2주 전쯤에 말했습니다. 대체 ‘이거’가 무엇일까 아이의 손으로 눈을 돌리니, 두루마리 휴지를 다 쓰고 남은 휴지심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걸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든다고? 어떻게? 만들 수 있겠어?”
“응! 밑에 이렇게 기둥을 만들고, 위에는 이렇게 쌓아서 만들면 돼! 그러려면 이거 엄청 많이 필요하겠다.”
크리스마스가 지난지도 한참 되었고, 왜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만든다는 뜻인지 100퍼센트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일단 만든다고 하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몇 개나 모아야 하느냐고 물으니, 밑에 기둥에는 4개가 필요하고 그 위에는 눕혀서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무작정 모은 뒤 2주 정도 지나니 18개를 모았습니다. 마지막 하나를 더 모으기 위해 아이는 얼마 남지 않은 휴지를 들고 다니며 휴지가 필요할 때마다 건내곤 했습니다. 그렇게 19개가 모이자 당장 만들자고 조르는 아이는 글루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집근처 천원샵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이전에 사자마자 바로 고장난 물건밖에 없어서 ‘엄마의 힘’으로 알아서 붙여보겠노라 큰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온 가족이 둘러앉아, 19개의 칙칙한 휴지심에 물감으로 색을 덧입히기 시작했습니다. 4개는 빨간색, 15개는 초록색으로 칠한 뒤 잠시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며, 저는 고뇌에 빠졌습니다.
‘글루건을 쓰지 않고, 어떻게 붙여야 할까? 휴지심과 휴지심이 만나는 부분은 원형의 접점이기 때문에 풀로도 잘 붙지 않을 것이고, 테이프만으로 붙이면 틀어질수도 있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처음 빨간색으로 칠한 4개의 밑기둥을 서로 마주 붙여 테이프로 가볍게 연결했습니다. 정사각형태로 붙이는 일은 간단했고, 생각보다 단단히 고정됐습니다. 문제는 초록색으로 칠한 15개의 잎부분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구멍을 뚫어서 실로 연결하려고 생각한 뒤, 아이에게 조금 흔들려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움직이면 안된다’는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실 대신 빨대로 고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는 구멍 뚫을 송곳조차 없어서 볼펜으로 휴지심을 뚫은 뒤, 연필심으로 구멍을 늘렸습니다. 가장 하단부터 5개, 4개, 3개, 2개, 1개 순으로 쌓고자 14개의 휴지심에 20개의 구멍을 뚫어 빨대로 튼튼하게 연결했습니다. 빨대에 휴지심을 꽂고 있자니, ‘떡꼬치 같다’며 아이는 해맑게 웃더군요. 저는 웃는 것도 잠시, 15개의 나뭇잎들이 틀어지지 않게 조절하느라 최고의 몰입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연결이 끝나자 완성한 듯한 후련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차! 이건 생각도 못했네. 아래 빨간 기둥과 위의 초록 잎을 어떻게 연결하지?’
빨간 기둥과 초록 잎을 연결하기 위해 두 뭉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심하는 저를 보고 아이는 어려우면 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후한 인심을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거 튼튼한 트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열정적 엄마인 저는 끝까지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습니다. 2개의 빨대를 가져와서 이리저리 연결할 곳을 대보며 머릿 속에 설계도 아닌 설계도를 펼치고 있었지요. 그러다 문득 좋은 방법이 생각나 바로 구멍을 뚫고 무사히 고정시켰습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 ‘나는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거지?’와 같은 생각이 마구 들었습니다. “엄마가 지금 누구 숙제하고 있는거지?” 라고 말하며 아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이는 바로 자기 숙제라고 답하며 방긋 웃어보였습니다. 아이가 만들고 싶어하는 물건을 엄마가 만들어주는 이 상황을 보니, 손재주가 많았던 아버지가 저의 만들기 숙제를 도와주셨던 어린시절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트리 장식용으로 색종이도 함께 자르고, 휴지심 연결 사이사이 빈 공간에 끼워 붙이니 그 어느 때보다 성취감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트리 장식도 처음부터 빈 공간에 끼울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아이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답하더군요.
“딸아, 넌 다 계획이 있구나.”
아이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는 문득 ‘문제 해결사’가 나의 천직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겠다고 ‘큰 그림’을 그리는 건 아이의 몫, 그 큰 그림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건 엄마의 몫인가 봅니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굶주렸던 창의성이 한 순간에 발휘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를 위해 썼던 이 집중력과 창의력을 평생에 걸쳐 써 왔더라면 저는 이미 발명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휴지심을 모아 트리를 만드는 기나긴 과정 속에서 아이의 인내심에 내심 놀라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황당해보이는 이런 도전을 하는 이유가, 어쩌면 아이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거 한 번 해볼까’ 하며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힘들어.’ 등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먼저 떠올리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사실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은데, 지레 겁부터 먹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도 아이에게 인생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