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계속 바쁘다 보니 몸도 피곤하고 기분이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출근했는데 아침부터 상사가 내 방에 들렀다.
“**** 평가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여태 그 질문을 용케 요리조리 피했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나는 무방비 상태로 찔리고 말았다.
“아.. 저.. 요새 계속 다른 업무로 바빠서 아직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조금씩 해보겠습니다.”
레이저가 나오는 그녀의 눈을 피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전을 펼쳤다. 아 정말 강렬한 에네르기 파를 한 방 얻어맞으며 시작하는 아침이다.
그동안 하기 싫어서 책상 구석에 밀어 넣었던 평가 관련 서류들을 다시 꺼내 본다.
'아니, 내가 노느라 안 했나. 시간이 없었으니 못 했지. 에효. 아니야, 이래선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리자. 내 황금 같은 시간을 내어주며 그 대가를 받는 ‘일’을 하는 거야. 그러니 근무 시간에는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고 해야 할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자.'
자꾸 미꾸라지처럼 머리에서 미끄러지는 집중력을 다잡아보며 오전 시간을 넘겼다.
이윽고 점심시간, 교대로 식사를 해야 해서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그들이 돌아오면 늘 마지막에 혼자 점심을 먹는데 오늘은 모처럼 평소 점심을 잘 안 드시는 실장님이 밥 먹으러 같이 가자고 식당으로 향하는 나를 따라오셨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 친구 중 제주 1년살이를 하는 친구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주 흥미로워하시며 1년 살기는 어떻게 하는 거냐. 그 친구는 뭘 하며 지내는 거냐. 일은 어떻게 하고 내려갔냐 등의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일이 안 맞는 것 같아. 그냥 다 그만두고 제주살이하고 싶어. 거기에서는 사람도 삶도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여.”라고 하셨다.
잠자코 듣던 나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어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죠. 꿈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계 역시 삶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저 역시 이 일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는 없어요. 제 친구의 경우는 휴식을 위해 제주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었는걸요.”
정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견딜 수 없어 죽을 것 같은 지경이 아니면, 다들 그렇게 가슴에 꿈을 한두 개씩은 묻어두고 오늘 주어진 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살아간다. 만약 왜 꿈을 좇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생계의 고귀함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좋아하는 일, 내게 찰떡같이 맞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들은 드물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세상이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계속 돌아갈 수 있다. 만일 모두가 생계유지는 버려둔 채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면 톱니바퀴는 멈추고 세상은 고장 날 것이다.
지난날,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속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울분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곤 했었다.
“너는 그냥 부속품일 뿐이야. 너트와 볼트처럼 큰 기계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그런 작은 부품, 그러니 네가 없어도 다른 부품이 들어오면 그뿐인걸.”
이제 와 그 말을 다시 짚어보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는 나는 부속품이 맞다. 그러나 너트 하나 볼트 하나도 기계가 작동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 부속품이다.
며칠 전 내가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니는 전동 스쿠터에 붙어있는 주차 킥 스탠드 너트가 하나 빠지는 바람에 스탠드가 제대로 서지를 못해 스쿠터를 어디 벽에 기대지 않고는 세워둘 수 없었다. 그 작은 너트 하나가 여태 스쿠터를 세우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그만 나사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사실 이 분야에서 나는 꽤 전문적이고 숙련된(?) 너트로 평가받는 편이니 자신을 쓸모없는 부속품 인양 매도하며 굳이 괴롭힐 필요도 없다.
상사에게 한 소리를 듣더라도 과장된 자아비판을 할 필요도 없다. 일하기 싫다고 아무 계획도 없이 사표를 던지고 환상의 섬으로 간다고 해도 삶은 생각처럼 아름답게 흘러가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만 살 수는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피할 수 없다고 생각지 말고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자.
일과 함께 오는 스트레스조차 잘 달래야 하는 아이로 대하자.
오늘 하루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사는 우리는 모두 밤하늘 자기 자리에서 빛나는 별과 같이 아름다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