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잡동사니로 쌓여있는 수납 장안 정글을 헤치고 늪지대 깊숙이 숨어있던 가방을 끄집어냈다.
예전에 친구한테서 받은 것인데 온갖 물건을 다 집어넣어도 내부 공간이 꽤 넉넉한 가방으로, 계속 사용하다가 가방 색이 지겨우면 뒤집어서 다른 색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아주 실용적인 양면형 토트백이었다. 원래 많이 싸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던 나는 한동안 그 가방을 아주 열심히 들고 다녔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고 다니던 수영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할만한 다른 운동을 찾아 헤매다가 직장 근처에 헬스장을 발견했다. 그곳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운동복에 물통까지 들고 다니려니 좀 더 활동적인 백팩이 좋겠다 싶어 새로 구매했고, 잠시 메다가 다시 그 가방으로 바꾸어야지 했었는데 그런지가 훌쩍 2년 넘어버렸다.
요즘 글을 써보겠다고 결정한 후 책이며 노트, 작은 필기도구에 무선 키보드까지 들고 다녀야 할 물건들이 계속 늘어나 큰 가방이 필요한 시점이 다시 찾아왔다.
백팩에 있던 물건들을 다 옮겨 놓고 가방끈을 들어 어깨에 짊어지는데 어라? 뭔가 거뭇거뭇한 작은 조각들이 손에 묻어났다.
세상에나..
수납장에 잠들어 있던 세월 동안 인조가죽이 삭아서 으스러지며 생긴 조각들이었다.
순간 목구멍으로 작은 속상함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비싸고 예쁜 가방은 아니지만, 친구로부터 받은 의미 있는 것이었고 내가 정말 애용하던 물건이었는데 옷장 구석에 홀로 유기되었던 세월 동안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죄책감까지 밀려들었다.
물건도 관심을 못 받으면 죽는다.
가방처럼 생명이 없는 물건도 사람의 애정 어린 손때의 접촉이 멈추면 주인에게 버려진 동물들이 그 마음의 상처로 시름시름 아파하듯 헐어가고 너절하게 된다.
그것은 많이 사용해서 해어지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사용하다가 닳아지고, 찢어지고, 낡아지는 것은 일상이라는 소모전과 싸우다 입은 영광스러운 상처다.
나와 함께했던 역사를 만드는 그런 상처는 때론 물건에 대한 애착을 오히려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첫 세상에 나와서 주인의 사랑을 받고 살다가 그 사랑이 새 물건이나 다른 물건으로 옮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오래된 물건은 졸지에 보호자 없는 아이가 되어 세월의 직격탄을 그대로 맞고 망각의 강물로 떠내려가게 된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설득의 심리학'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람은 한번 부여받았던 자유를 갑자기 잃어버리면 심리적 반발 반응이 일어나 오히려 처음 그 자유를 완전히 억압받으며 살았을 때보다 더 강렬한 저항을 하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흑인 폭동의 경우, 그들을 차별하던 공식, 비공식적인 모든 규제가 철폐되며 처음에는 흑인 가정의 소득이 많이 증가했으나 실생활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자 그들의 경제적 지위가 다시 후퇴하며 벌어진 반발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심리적 반발 현상이 다른 감정에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쓰던 물건에 대한 애착이 그 물건을 떠날 때 오래된 물건 역시 익숙했던 사랑이 떠나감에 강한 감정적 반발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나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가방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 천하의 나쁜 배신자이고 내 가방은 비련의 여주인공인 것만 같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다.
가방은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개발한 슬픔의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를 그대로 밟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결하는 길을 택한다.
사람도 물건도 헤어짐이 중요하다
만약 쓰던 물건을 한동안 쓰지 않다가 추후 다시 쓸 생각이면 습기가 없는 쾌적한 장소에 잘 닦아서 보관하며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방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안락한 장소에서 휴식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게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라면,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물건이 사랑받을 수 있는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마저도 여의찮아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영광의 역사를 함께 보냈던 전우를 떠나보내듯, 그렇게 이별하자.
그 사랑에 마무리를 정성스럽게 짓자.
이제 가방과 이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