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있는 용기

by 안희정

"나 대회 포기했어..."


매일 다니는 헬스장에 운동 메이트가 한 명 있다.

앞서 언급했더 나보다 두 살 위인 화려한 싱글의 그녀는 바디 프로필을 4번이나 찍었을 정도로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프로다.


그런 그녀가 작년 여름, 4번째 프로필을 마친 후 더 높은 목표로 정한 것이 바로 보디빌딩 대회.

대회는 커녕 바디 프로필 하나 찍기에도 미천한 몸을 가진 내게 그녀의 목표는 상상 속에서만 있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섬럼 여겨졌다.


이 바닥에서 웨이트 운동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몸에 욕심이 생긴다.

어좁이 어깨도 더 키우고 싶고, 배도 빨래판 모양 복근으로 만들어보고 싶고, 처진 엉덩이도 성난 듯 올리고 싶어 진다. 그리고 피나는 노력의 결실을 사진으로 영원히 남겨 빛나는 날들의 몸을 기념하고 싶어 진다.


나도 프로필에 대해 한동한 고민을 했었는데 도전하지 않은 이유는 식단 때문이었다.

나는 먹는 걸 좋아한다. 좀 더 간단히 말해 먹기 위해 운동한다. 매일 기름진 음식을 배 터질 때까지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는데 한계를 두는 편은 아니다.

천만 헬스인들의 우상 김종국이 말했다.

먹는 것 까지가 운동이라고. 그러나 난 먹는 운동은 하기 싫었다.

내게는 처음부터 운동의 목표가 아름다운 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이 었으니까(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만든 멋진 핑계에 잠시 감탄한다).


그래서 작년 바디 프로필을 같이 찍자던 그녀의 끈질긴 구애를 고심을 거듭한 끝에 거절했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는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달리는 지칠 줄 모르는 기관차 같았다.

보디빌딩 대회를 목표로 세운 후 말 그대로 운동에 더 매진하기 시작했다.

트레이너의 지도하에 본격적으로 대회를 위한 몸만들기에 돌입하고, 운동 시간도 더 늘리고, 일 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장으로 출근했다. 그와 함께 안 그래도 조촐하던 그녀의 식단은 갈수록 더 빈약해져 갔다. 열정의 불이 활활 타올라 그녀 자체가 열정의 화신처럼 보였다. 태닝까지 시작한 뒤로 완벽에 가까운 몸은 완벽을 넘은 헬스 여신의 몸으로 점점 변모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그녀의 몸속과 정신은 완벽한 몸을 따라가기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조금씩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활활 타오르는 열정 앞에서 감히 그 걱정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그런 행위는 타오르는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일 뿐이었다.

마지막 결승선을 몇 미터 남기고 길고 긴 레이스 위를 쓰러질 듯 달리는 마라토너에게 그 누가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침묵하는 것이 그녀를 가장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기관차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의 이상신호를 느꼈으나 자신이 바라보는 큰 목표를 위해 그 신호를 무시했다. 신호는 처음에 깜빡거리는 작은 빨간 불빛일 뿐이었다. 조금 불편했지만 생활하는데, 운동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대회가 코앞이었다. 반딧불이 불빛 같은 작은 불편함에 신경을 쓸 시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무시했던 불빛이 조금씩 커지더니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해졌다. 그녀는 그런 몸을 이끌고도 헬스장에 여전히 출근 도장을 찍었다. 힘을 줄 때마다 통증이 온몸을 마비시킬 듯 덮쳐왔다. 그래도 그녀는 달렸다. 나중에는 너무 아파 타이트한 레깅스를 입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대회를 불과 한 달 남짓 남기고 그녀는 포기를 선언했다.


"나 대회 포기했어. "


"언니.. 때로는 포기하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해. 그래서 난 언니가 지금 정말 큰 용기를 냈다고 생각해."


그녀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대회를 나가겠다고 공표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응원했다. 그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는 더 열심히 운동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으니 그건 바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나는 평소 생에 있어 끈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는 하는데, 지금은 포기의 현명함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는 것이 참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원래 매번 들어맞는 정답은 없다.

힘든 일상을 이길 수 있는 끈기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무엇을 장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명예나 체면, 위신의 끈에 묶여 계속 끌려다니게 되면 어느 순간 진정한 나는 닳아서 해지고 그 자리에는 남들이 정의한 보기 좋은 허울만 남게 된다.

나는 그녀가 포기한다고 말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간 말을 못 했지만 그녀가 참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현명했고 주변의 시선을 이기고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


우리의 삶은 매번 할리우드 영화처럼 갈등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영예로운 해피엔딩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은 멍들고 다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이루며 행복하게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가 망가지는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끈기만을 앞세워 끝까지 밀어붙이려고 하다간 찰나의 영광스러운 순간 뒤로 영영 복구가 불가능한 참담한 시간을 맛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냉정한 현실을 우리는 처연하게 견뎌내야 한다.


때로 너무 달렸다 싶으면 쉬어가야 하고, 정말 이 길이 나를 위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추는 용기도 필요하다. 럴 때의 포기는 진짜 포기가 아니라 잠깐의 충전, 또는 새 출발 위한 숨 고르기이다.


가슴을 따갑게 만드는 나를 향한 시선과 내면의 망설임을 이기고 용기 있는 결단을 한 그녀에게 나는 오늘 갈채를 보내고 싶어 진다.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용기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