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며 행운을 발견하는 순간
유독 힘든 한 주였다.
일상의 바쁨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는 유달리 감당하기 버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니다. 실은 일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견딜 수 없는 무게에 눌린 듯 계속 괴로웠다.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초는 며칠 전 업무 중 들은 누군가의 비난 섞인 한마디였다. 그 말이 귀를 타고 들어온 순간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떼로 몰려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일을 한 지가 20년인데 여전히 이런 작은 한마디 말에 흔들리는 내가 싫어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앞으로의 20년도 계속 일 속에 파묻혀 우울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기분이 계속 바닥이니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내내 감춰둔 못나고 초라한 면을 구태여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다.
빈곤하고 옹색한 마음이 갈 곳을 잃었다.
카톡에 깔린 여러 단체 채팅방으로, 관심에도 없던 인터넷 연애 뉴스로, 유튜브의 시답잖은 농담들로, 때로는 마음을 정화해주는 에세이집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몇 번이나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며 글을 써보려고도 했었으나 여기저기 돌부리에 걸려 자꾸 넘어지듯 한 문장 한 문장 매끄럽게 나아가지를 못했다.
결국 그 글들은 그대로 휴지통 폴더로 들어갔다.
속이 상해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었다.
문득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보니 궁색한 표정을 지닌 초라한 영혼이 나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일에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 숨어버리고 싶어지는 요사스러운 마음이 참 원망스럽다.
나이는 허투루 먹었나 보다. 조금은 성장한 줄 알았던 내 영혼은 전혀 강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무기력증의 물이 진하게 들었다.
물든 부분을 지우려고 벅벅 문지르다 지쳐 그냥 내팽개쳐버렸다. 사실 이 물은 이번에 새로 물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빛깔인데 마치 처음 보고 당황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내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빨리 자는 게 상책이다.
나는 퍼렇게 물든 마음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일요일 새벽, 여느 때처럼 눈을 떴다.
무기력해도 내 몸은 기계적으로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해냈다.
졸린 눈을 비비고 화장실을 다녀와서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서 요즘 제일 먼저 하는 일, 시 한 편을 읽었다.
오늘의 시는 윤동주의 그 유명한 '서시'이다.
자 그대여, 나와 함께 읽어보자.
서시
-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안 들어본 사람이 없다는 서시(라는 제목에 신성우를 떠올릴 수 있는 당신은 내 친구, 반갑다 친구야).
그 시 한 줄에 초라한 영혼 하나가 부끄럼을 느낀다.
가사를 개사하듯 시를 개사해본다.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을 이기고
일어나 걸어가기를,
삶이 주는 괴로움보다
희망을 올려다 보기를,
길가에 핀 잎새에도
기적을 발견하기를,
모두를 사랑할 순 없어도
나를 위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기를,
이 아침에도 별은 총총히 박혀있다.
생각의 샘물이 퐁퐁 솟아 올라온다.
나는 내가 개사한 샘물을 눈으로 떠본다.
몹시 구리텁텁, 고리탑탑한 냄새가 나는 글이다.
그런데..
효과가 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사소한 무게의 일은 이렇게 사소하게 풀면 되는 것을 너무 무겁고 거창하게 풀려고 했었나 보다.
갑자기 인기척도 없이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눈을 반쯤 뜬 딸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온다.
"엄마 뭐해. 나 심심해."
일요일은 절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찍 일어나는 착한(?) 딸이다.
나는 디즈니 영화를 한 편 보는 게 어떠냐고 유혹했다.
겨울왕국 2를 보겠다고 한다(아싸).
딸이 거실에 있는 TV 속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아이템을 조금 더 획득했다.
살짝 올라간 기분이 더 밝아졌다. 글을 쓰다가 빼꼼히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적의 동태를 살폈다.
'음... 아주 빠졌군그래.'
으스스하고 섬뜩한 미소를 퍼트리며 그녀를 훔쳐보다 문을 다시 닫으려는 찰나, TV 속에서 성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게 전달되었다.
겨울왕국 2"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는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어요."
타이밍이.. 절묘하다.
그 말이 지닌 함축적인 의미가 머릿속을 뚫고 들어왔다.
힘들다고, 내 답답한 현실이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투덜대던 철부지 영혼에게 준 깨달음.
그래요, 트롤 할아버지.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생각하고 암울해 할 시간에 오늘 제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게요. 그럼 안개 낀 듯 불확실하고 어두웠던 미래가 언젠가는 선명하게 빛날 수 있는 날이 있겠죠.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고달픈 일상의 굴레에서 신세를 한탄할 시간에 내가 유일하게 조정할 수 있는 내 마음을 다잡고 다음 할 일에 몰두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읊조렸다.
당신 주변에도 분명 에너지 뱀파이어가 있을 것이다.
에너지 뱀파이어의 몇 마디 말에 물렸을 때는 물론 처음에는 기분이 급속도로 고갈되는 느낌이 올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위를 둘러보면 삶의 소중함을 다시 깨우쳐줄 의미들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번의 깨달음의 재료들은 시 한 편과 만화 속 대사였다.
이런 게 바로 글과 말이 지닌 힘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슬픔에 빠진 노인 - 빈센트 반 고흐 -
나는 다시 결심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슬픔의 빠진 노인'처럼 누군가로부터 받은 비난에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할 시간에 차라리 천근의 고개를 억지로라도 들고 행운(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며 진짜 행운의 순간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며 살겠다고.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고,
내일 아침에도 총총히 박힌 별은 머리 위에 숨어서 나를 축복하며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한 줄 요약 : 에너지 뱀파이어에게 물렸을 때는 행운(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며 진짜 행운의 순간을 만끽하고 다시 기운을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