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너무 길어져 얼마 전 항상 다니던 미용실을 예약했다. 사실 훨씬 전에 잘랐어야 했지만, 갑자기 대상포진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잘랐어야 할 시기를 한참 지나쳤다. 내 머리는 곱슬머리인 데다 머리숱도 적고 모발이 얇아 길이가 어깨 아래로 내려오면 부스스해지고 어딘가 모르게 추레해 보인다. 그럼 짧게 자르면 그만인데 두발 제한이 존재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기에 그에 대한 반감이 남아 스무 살 이후로는 짧은 머리를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항상 어깨선까지 오는 중단발 기장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머리가 어깨를 많이 넘어가면 다시 어깨선까지 자르는 게 나만의 스타일 방식이다. 이번에는 머리 길이가 가슴까지 닿았으니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지난 지 오래다.
현충일 아침, 예약한 시간인 오전 8:30분에 정확히 미용실에 도착했다. 당연히 내가 첫 번째 손님이리라 예상했는데 미용실에는 이미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 한 명이 머리에 염색약이 발라진 채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이 미용실은 여자 원장님이 혼자서 일하는 미용실이다. 10평 남짓 작은 가게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왼쪽 벽에 나란히 붙어있는 긴 거울 세 개와 미용 의자 세 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맨 마지막 의자 옆에는 폭이 내 한쪽 팔 정도가 되는 칸막이가 천장까지 뻗어있어 구역이 구분되어 있다. 칸막이 뒤로 들어가면 쉽게 젖혀지는 의자와 그 위로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세면대가 놓여있다.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푹신해 보이는 2인용 작은 소파가 보이고 그 뒤로 계산대가 있다.
곧바로 미용실 원장님에게 인사했다.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철저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뀐다. 원장님이 손님용 가운을 활짝 펼쳐 내 뒤로 가자 곧바로 두 팔을 뒤로 뻗어 가운을 입었다. 말 한마디 없이 이루어지는 이 짧은 동작 속에 지난 5년 동안 나와 미용실 원장님의 역사가 드러난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도 어느새 7년이 흘렀는데 초기 2년 동안은 마음에 드는 미용사를 만나지 못해 예전 살던 화곡동 미용실까지 전철을 타고 가곤 했다. 왕복 3시간 거리에 서서히 지쳐갈 때쯤 직장 동료가 지인이 하는 미용실이라며 이곳을 소개해주었다. 처음 이 미용실을 왔다가 원장님의 커트 솜씨에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위치도 직장 근처라 오기에도 편해서 이후로 줄곧 이 미용실을 다닌다. 미용실에 다니고 좀 시간이 지난 뒤 원장님이 나와 동갑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이가 같다고 해서 더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우리 세대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더 잘 이해하고 맞춰줄 것 같아서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미용 의자에 앉으니 원장님이 다가와 말했다.
“늘 하시던 대로 어깨까지 자르고 파마하실 거죠?”
원장님에게 대답하기 전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단발이 어울리는 유명연예인들의 사진이었다.
“미용실을 예약하고 며칠 동안 고민하고 검색했어요. 머리를…. 한 번 좀 짧게 자르고 싶어서요.”
그 뒤로 이어진 원장님의 현실적인 충고는,
“그 머리는 드라이해서 그런 거지 파마로는 절대 그렇게 나오지 않아요.”라든지.
“이건 머리숱이 많아야 예쁜 머리예요.”같은 말들이었다.
그 말을 듣고 곧장 시무룩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평소에 하던 스타일로 해달라고 말했다. 옆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다시 온 원장님은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대신 결단을 내려주었다.
“그래도. 원하시니까 한번 해보죠. 단발이 손님에게 생각보다 잘 어울릴 수도 있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가위로 머리칼을 내려치는 그녀의 행동에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계속 흘깃거리며 가슴속에서도 무언가 함께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거울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가져온 책을 읽었다. 책의 페이지는 매우 더디게 넘어갔다. 그사이 나와 동고동락을 같이한 머리칼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원장님은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감긴 뒤 드라이기로 대충 말렸다. 파마약을 바르고 헤어롤을 말았다. 잠시 후 원장님이 열을 가하는 기구를 머리 위에 가져와 기계를 켜자 뜨끈뜨끈한 기운이 머리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긴장했던 탓인지 나는 곧 늦은 저녁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사람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한참 사경(?)을 헤매다 머리에 차가운 중화제를 뿌리는 원장님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머리를 또 감고 의자로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매우 낯선 사람이 있었다. 분명 나인데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원장님은 생각보다 머리가 잘 나왔다며 다음에는 쇼트커트에 도전해 봐도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거울로 여러 차례 머리를 살펴보며 괜스레 휑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상황은 끝났다고 생각하며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원장님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으로 미용실을 나왔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어려 보인다는 칭찬을 해준 이도 있었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정말 달라 보인다.”였다. 또 다른 말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머릴 잘랐냐는 질문이었다. 대답할 말을 찾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갑자기 15년 넘게 바꾸지 않던 머리 스타일을 바꿨을까? 특별한 계기도 없었는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요즘 내 생활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겉으로는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똑같은 삶이었지만, 무언가 중요한 게 빠진 느낌이었다. 글쓰기를 향한 진했던 사랑도 바래졌고, 퇴근 후 매일 가는 헬스장도 재미가 없었다. 딸은 6학년이 되며 점점 내 손을 찾지 않았고, 직장에서의 시간도 바쁜 날은 있었지만, 큰 사고 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무난한 시간이 무기력으로 다가왔고 그 점이, 슬펐다. 무거운 가슴을 덜어줄 변화를 갈망했다.
머리를 자르는 시도는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나의 작은 시도는 성공했을까? 머리를 자르고 보니 확실히 기분이 달라졌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 작은 변화가 나비효과가 되어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오기를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변화의 선순환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주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니까. 그것도 점심시간에 밥 먹는 것조차 잊고서….
인생의 변화는 항상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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