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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Oct 26. 2022

달이 전깃줄에 대롱대롱 걸린 날

나에게는 여동생이 둘 있다. 자라면서 숱하게 싸웠는데 어느새 모두 결혼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린 동생들은 각각 아들 하나씩 낳았다. 나이 들면 자매는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더니 이제 우리는 좋은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주말에 두 동생네 식구들과 캠핑하러 갔다. 10월 말이라 밤뿐만 아니라 낮 기온도 제법 쌀쌀해졌지만 요즘 들어 부쩍 캠핑에 푹 빠진 동생들은 각종 캠핑 관련 장비들을 두루 갖춘 탓인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나는 캠핑을 즐기지 않는다. 추운 밤공기로 에워싸인 밖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거리낌이 분명히 있다. 동생들은 자신들도 처음에는 그랬는데 코로나 상황 2년 동안 에너지 넘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주말에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시작했다가 재미를 붙였고 지금은 틈만 나면 간다고 했다. 우리 집은 캠핑 장비는 없지만, 텐트는 하나 있었다. 그래서 장비를 다 가진 동생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전날 밤 회식으로 집에 오자마자 피곤함에 지쳐 쓰러져 잠이 들어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출근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남편이 딸을 데리고 차를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곧장 남양주의 캠핑장으로 출발했다. 나는 평소 차만 타면 멀미가 나서 잠을 자는 데다 그날은 전날 회식으로 인한 피로와 일을 마친 후의 고단함으로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다 왔다는 남편의 말에 눈을 떠보니 차는 이미 캠핑장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려 동생네 식구들을 발견하고 곧장 그쪽으로 다가갔다. 동생들은 이미 텐트를 거의 다 치고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었다. 잠시 후 부지런한 막냇동생은 로제 볶이를 뚝딱하고 만들어왔고, 우리의 식도락 캠핑은 그때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설 캠핑장이라 전기는 물론이고 샤워실, 화장실, 개수대까지 하룻밤 자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고 아이들을 위한 트램펄린과 그 옆으로 작은 모래 놀이터까지 있었다. 놀이터 한쪽 벽은 곧 다가올 핼러윈 데이를 위해 귀여운 해골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충분했다. 조카들은 트램펄린과 놀이터에서 노는데 정신이 없는데 우리 딸은 놀이터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저긴 별로 흥미가 없다며 내가 가져온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요즘 들어 잘 움직이려 하지 않는 건 기나긴 코로나 상황으로 집에서 늘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리된 건지, 아니면 부쩍 큰 키와 함께 사춘기가 온 탓인지 나는 아직도 헷갈린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테이블 세 개를 붙여 다 같이 둘러앉고는 준비해온 온 삼겹살과 가리비를 구워 먹고 모닥불을 피웠다. 저녁을 다 먹고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어른들은 모닥불 주위에 빙 둘러앉아 불멍을 즐겼다. 나는 저녁을 먹으며 마신 와인 한 잔에 금세 취기가 돌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딸과 함께 텐트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지고 온 전기장판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침낭을 쫙 펼쳐 이불처럼 깔았다. 그리고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만 하고 돌아와 텐트 안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바로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4시 반이었다. 딸이 깰까 봐 금세 핸드폰 알람을 끄고 다시 누웠다. 등은 따습고 차가운 공기에 코는 시렸다. 그 느낌이 재밌었어 한동안 뒹굴뒹굴하다 조용히 텐트 밖으로 나와 곧장 바로 앞에 주차된 차로 갔다. 코골이가 심한 남편은 술을 마시면 그 소리가 더 심해져 자신은 차박을 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다가 감기 걸리니 그냥 텐트에서 다 같이 자자고 했었는데 역시나 혼자 차 안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내가 차 문을 열자 차 실내등이 바로 켜졌고 그 불빛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런 남편을 억지로 끌어내 텐트에 밀어 넣은 후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어느새 5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사방이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깜깜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이 검은 벨벳 드레스에 달린 스팽글처럼 반짝거렸다. 그 옆으로 웃는 실눈을 그린 것 같은 초승달이 전깃줄 사이로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달을 자세히 보려고 몇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초승달이 전깃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달은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는데 내 시선에 따라 전깃줄 아래에도, 위에도, 줄에 걸쳐지기도 했다.


문득 삶에 대한 태도도 내가 지금 달을 보듯이 유지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듣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상황 아래 깔릴 수도, 넘어설 수도, 그리고 줄에 묶인 듯 잡혀있을 수도 있다. 상황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고, 반응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고, 감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러니 힘든 일이 닥쳤을 때는 현상을 확대하여 해석하거나, 해보지도 않고 좌절하지 말고 일단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한 발짝 움직여 그 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차분한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본 다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어렵지만 넘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일단 시도하면 된다. 그래도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으내가 선택한 방법에 문제는 없는지 다른 관점으로 보면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언젠가 큰 산도 지나고 바다도 건너가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계절의 변화를 다 이겨내고 가을에 몰랑몰랑 영글은 선홍색의 달콤한 홍시처럼 다양한 경험으로 무르익은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디선가 저 멀리서 수탉이 울며 아침이 오고 있다고 알렸다.

차디찬 어둠 속에서도 전깃줄에 걸린 희망의 달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은 머지않아 눈부신 아침햇살이 온 세상을 포근히 감싸리라는 사실 역시 안다. 그건 단지 시간의 문제지만 오직 자각하는 만이 누릴 있는 기쁨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모처럼 맞는 한뎃바람이 제법 견딜만했다.


한 줄 요약 :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해결의 실마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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