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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Dec 02. 2022

나는 결코 나의 셰헤라자데를 죽일 수가 없다.

 천일야화를... 기억하는가.

영리한 처녀 셰헤라자데가 샤리아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아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 날이 밝으면 그 처녀를 죽였는데, 셰헤라자데는 그러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왕은 그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된다. 특히 셰헤라자데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타인과의 관계가 어긋난 이후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신이 지쳤다고 말한 친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꾸 죽는 상상을 한다는 친구도 있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오늘처럼 고된 하루를 보낸 날에는 만사가 귀찮고, 우울하고, 세상이 미워진다. 어둑해진 퇴근길에서 나는 무연히 길가에 늘어진 나무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삶이 때론 우리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가끔은 그 거대한 무게를 지탱하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갑자기 알 수 없는 손이 가슴을 쥐어짜는 기분이 들어왔다. 순간 고르게 나오던 숨소리가 사방으로 불안하게 흐트러지며 사라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냉기를 가득 담은 바람이 살갗에 닿자 몸이 금세 움츠러들었다. 초대받지 못해 화가 난 채 들이닥친 어둠의 요정 말레피센트처럼. 그렇게 겨울이 찾아왔다. 잎사귀가 다 벗겨져 앙상하게 맨몸을 드러낸 나무의 초라한 행색이 정육공장에서 도축당한 채 일렬로 매달린 돼지고기를 연상하게 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밟을 때마다 쩍쩍 갈라져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을 칠 것 같았다. 이럴 때의 나는 우울한 기운을 끌어당기는 인간 자석이 된 듯 온갖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들이 하나둘씩 몸에 달라붙는다. 참 견디기 힘든 하루였다.


"엄마, 천일야화가 뭔 줄 알아? 책에서 나온 말인데 뭔지 잘 모르겠어."

마음을 추스르고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는데 딸이 불쑥 방에 들어와 물었다.


“천일야화는 옛날 아랍 쪽에서 전해지는 얘기야.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밤마다 들려주었던 이야기로...”

나는 오랜 기억을 더듬거리며 천일야화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다.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니 내내 죽상이었던 얼굴이 스르륵 펴졌다. 딸의 존재는 내가 감사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아무리 불행한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한 날조차 나는 아이의 웃는 얼굴 속에서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아이를 보내고 방금 얘기한 천일야화를 천천히 되뇌었다.


천일야화 속에 인생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었다...


샤리아 왕은 셰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 다음날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인생은 오늘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 일이 궁금해하는 천일야화 속 왕과 같다. 아무리 똑같은 일상을 살더라도 내가 방향키를 살짝만 다른 쪽으로 튼다면 나의 미래는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키를 가진 잡고 있는 자는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나의 항해 경로가 된다.  


나의 이야기는 결코 오늘 끝나지 않는다. 끝나기는커녕 내가 살아내는 한 새로운 이야기는 계속 생성된다. 새 이야기를 처음 쓸 때는 막막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살아남아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인연 같은 깜짝 선물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럼 나는 그 인연으로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한다.


살아있어서,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내 인생에 들어와 준 모든 인연이 참 고맙다. 나는 앞으로 또 어떻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낼까. 미래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더 기대된다. 그렇게 오늘을 살다 보면 그 과정에서 천일야화 같은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고전이 나온 것처럼 언젠가 나만의 찬란한 서사도 탄생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 인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나는 결코 나의 셰헤라자데를 죽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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