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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Dec 28. 2022

소원 저장소에 소원 놓고 가기.

얼마 전 주말에 경주로 1박 2일 워크숍을 다녀왔다. 말이 워크숍이지 호텔에서 저녁 먹고 하루 자고 다음 날 돌아오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토요일 오후 1시에 근무가 끝나자마자 광명으로 가서 KTX를 타고 출발해서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때쯤 경주역에 도착했다. 호텔로 가서 식당에서 같이 간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라운지 바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밤 9시가 넘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동안 졸음을 쫓아내려 팔을 꼬집으며 버티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방은 무척 고급스러웠고 깔끔했으며, 방 밖으로 보이는 호수는 호텔 불빛에 비쳐 그윽한 검푸른 빛을 우아하게 뽐냈다. 하늘에 떠있는 별조차 옹기종기 모여 화사하게 반짝거렸지만 나는 너무 피곤하여 그것들을 오래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과 피로 속에 파묻힌 채 다음 날 아침까지 완전히 숙면했다.      


전날 얘기하던 중 한 사람이 그래도 경주까지 왔는데 불국사는 들렀다 가자고 제안했고 다들 동의했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은 일찍 일어나 뷔페에서 조식을 먹고 부지런히 짐을 꾸렸다. 11시 체크아웃 시간까지는 아직 3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우리가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불국사에 내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가을 단풍이 지난주 절정이었다는데 그새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예쁜 단풍은 볼 수 없었지만 오랜 세월의 연륜이 엿보이는 소나무는 변함없는 풍성한 초록의 솔잎을 보여주며 환영의 팔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불국사의 대표인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을 제일 먼저 본 다음 사찰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과 여행하러 와서 불국사에 들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보탑 앞에서 사진 찍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작년 그 자리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던 남편과 딸의 얼굴을 겹쳐서 떠올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는 사찰의 명성에 걸맞게 절은 대웅전(보물 1744호), 관음전, 극락전 등 여러 법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불국사에서 눈여겨본 것은 우리나라의 대표 국보도, 보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불국사 처마 전체에 빼곡하게 걸려있던 소원 등이었다.      


나는 수많은 소원 등에 쓰인 글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사업 번창, 학업 성취, 재운 발복, 가족 건강, 만사형통, 득남 득녀...’ 저마다의 등에는 수많은 소원이 적혀있었다. 문득 저 많은 염원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등에 소망을 적기만 하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마법의 등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도 기꺼이 지갑을 열어 값을 지불하고 이루고 싶은 꿈이 넘쳐난다.      


그런 마음으로 소원 등을 바라보니 모든 등이 희망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듯한 상상에 빠져 잠시 이곳이 소원을 저장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다. 한 사람의 소원은 작은 에너지일 뿐이지만 작은 에너지가 계속 뭉쳐져 거대한 꿈 에너지 발전소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굳이 이 멀리 경주 불국사까지 와서 소원을 비는 걸까. 물론 불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아닌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여기는 한국 사람이라면 살면서 꼭 와본다는 그 유명한 절, 불국사다. 어쩌면 이렇게 너도나도 소원을 비는 이유는 유명한 장소에서 소원을 빌면 조금이라도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군중심리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힘은 약하지만 함께하는 힘은 강하다. 수많은 작은 소원들이 모여 강한 에너지를 뿜고 있는 이곳에 나도 갑자기 소원을 빌어보고 싶어졌다.   


나는 일행들이 불국사의 대웅전 석가모니 불상에 절을 할 동안 생뚱맞게 마당에 걸린 소원 등을 바라보며 나의 소원을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길, 그 순간들을 감사의 눈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나는 하릴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내 소원을 불국사의 처마 위로, 마당으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식당이 많은 골목이나 비슷한 업종끼리 모여있는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듯이, 소원 저장고 구석에 남몰래 놓고 간 내 소원들도 이 기운을 빌려 성황리에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유유히 불국사를 떠났다.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창밖의 경주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소원은 어디에 빌어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이루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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