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삼거리에는 아주 싼 가격에 야채와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다. 연희동 쪽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그 가게 앞을 필연적으로 지나가야 하는데 어마어마하게 싼 가격과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야채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쉽게 멈춰 서게 만들었다. 가게 밖과 안에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비었고 나도 몇 번 참외나 고추 등을 구매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집에 가져와서 게 중의 반은 그냥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 이후로 아무리 사람들로 가게 안이 북적거리고 "대파 천 원! 양파 천 원" 하는 유혹의 소리가 들려도 그냥 지나치게 되는 가게였다. 싼 가격에 맞추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물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과일이나 야채들은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시들거나 혹은 멍들거나 때론 벌레가 먹은 것들도 있었다. 나 하나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않아도 그 가게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그날도 그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늘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노곤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약간 지치고 피곤한 하루였으므로 허정허정 과일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연분홍빛 하늘처럼 불그스름한 복숭아더미가 1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이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대여섯 개 정도 소쿠리 안에 담겨 있는 복숭아는 군데군데 검은 멍들이 나 있고 벌레가 먹었는지 아니면 상처가 나서 그러한 것인지 움푹움푹 파인 데가 많았다. 상품가치가 전혀 없는 과일 무더기가 1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이고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할머니가 생각나 잠시 현기증이 났다.
한 때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던 나의 할머니.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유년은 가난했다. 낳아준 부모도 나몰라라 하던 아이들을 할머니는 억척스럽게 돌봤다. 쌀이 떨어지면 떡을 만들어 먹였고, 제철마다 고구마며 감자, 밤 등의 열매와 과일들을 가져오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밥보다 과일을 더 좋아하는 나로선 쌀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 것보다 먹고 싶은 과일을 먹지 못하는 게 더 슬펐다. 동네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과일과게 가판대에는 가을만 되면 봉긋한 홍시가 전구 불빛 아래서 다홍다홍하게 빛났다. 탐스런 홍시의 자태에 넋을 잃고 가판대 앞에 앉아 있다가 계집년이 남사스럽다며 할머니한테 머리를 쥐어박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홍시가 먹고 싶다고울고 불고 했다. 대여섯개에 천원하던 그 홍시들을 뒤로하고 할머니의 야속한 등을 따라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에 할머니는 투박한 말투로 한 달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짚이 깔린 박스에 한 가득 들어있던 홍시를 무슨 영문인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반쯤 으깨진 딸기, 멍이 든 사과, 껍질이 썩어서 물러 터진 귤 등 할머니가 가져오는 과일들은 언제나 신선하지 않았다. 밥보다 과일을 더 좋아하는 나는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원래 과일은 썩기 직전이 가장 맛있는 거라며 할머니는 물러 터진 부분은 칼로 도려내고 썩은 껍질은 벗겨서 나와 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쌀 살 돈도 없다고 매일 투덜거리셨던 할머니가 이렇게 많은 과일들을 도대체 어디서 가져오는지 궁금했지만 묻는 대신 열심히 먹었다.
삼 년 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느 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때보다 키도 컸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을 수 있고 못 본 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그날도 어김없이 다홍다홍한 홍시를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며 과일집 앞을 지나가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요즘 할머니 안 오시네... 할머니 때문에 이거 따로 빼뒀는데..." 하면서 내게 전해주는 검은 봉다리 안에는 안 익은 시퍼런 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봉다리를 받아들고 어정쩡하게 서서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할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아주머니는 깊은 한 숨을 쉬었다.
"무르거나 흠집이 생겨서 팔지 못하는 과일들 할머니 드리곤 했는데... 이것도 작년에 늬 할머니가 부탁하셔서 따로 빼둔 건데. 어차피 이건 홍시로 만들기에는 너무 작아서 상품가치가 없으니까..."
땡감을 박스에 넣고 신문지나 짚으로 덮어두면 삼주에서 한 달 정도 지나 홍시가 된다고 했다. 파란 감이 든 봉다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의 굽은 등이 생각났다. 야속하고 투박한 등. 나는 자주 그 등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했다. 할머니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을 어쩔 수 없이 모른척 할 수 없었기에 돌봤던 할머니는 우리 때문에 편안하지 않은 노년의 삶에 대해 자주 한탄했다. 살갑고 따듯하고 애정이 넘치는 할머니가 아니어도 나는 할머니가 우리 곁에 있어서 그냥 그 자체로 의지했다. 할머니는 돈도 없고 힘도 없고 팔십이 넘었는데도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게 전부였고,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했지만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보실핌 받고 싶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못 미치는 할머니를 종종 미워했다. 내가 집에 와서 그 파란 감들로 홍시를 만들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로도 아주머니는 가끔 흠집 있는 과일들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할머니가 그랬듯이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잘 게 썰어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썩은 과일을 어떡해서든 팔아야 하는 이유가 그 가게 주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가게 월세 때문이거나 혹은 쓰레기 처리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등의 이유들로 그 과일들을 어떡해서든 팔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그런 과일이라도 사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정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 바구니 밑에 있는 "1000원"이라는 가격 때문에 부모 구실 못하는 손주들을 돌보아야 하는 조모의 입장이 있을 수 있고, 실직자 가장의 입장이 있을 수 있고, 빠듯한 생활비에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의 입장이 있을 수도 있고 다양한 입장을 가지 사람들에게 그 가격은 너무 유혹적이다. 유혹적이어서 참담하고, 참담하기 때문에 나는 그 가격표 대신 "그낭 가져가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1000원은 유혹적인 금액이지만 그 복숭아에게는 너무 과한 금액이다. 상품가치가 떨어져도 한참이나 떨어진 그 복숭아를 굳이 팔아야 했나에 대한 원망은 뒤로하더라도, 그 복숭아를 1000원이라는 가격에 사서 먹을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볼 때 그것에 붙은 가격표를 보는 건 여전히 힘들다. 그 야채가게 뿐만 아니라 이젠 흔한 동네 마트에 가도 썩어가는 바나나 세송이가 천원에 팔린다. 이젠 그 어디에도 그때의 과일가게는 없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의 과일가게는 가을만 되면 빠알간 홍시가 봉긋한 자태로 전구 불빛 아래서 다홍다홍 빛이 났다. 색을 가질 수 없어 가격표를 얻지 못한 시퍼런 감들은 할머니의 손에서 다홍다홍한 홍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