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 <어떤 시작>
윤자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힘껏 버텨보리라.
<어떤 시작>은 김지원의 1975년 작품이다. 김지원이 서른셋에 쓴 단편으로 지금 읽으면 올드한 소재일지 모르나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여성주의적인 소설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의 마흔 대의 여성들을 생각한다면 사실 정일과 윤자의 나이차는 소설의 분위기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쓰인 75년도라는 배경을 염두한다면 이 소설의 마지막은 두고두고 기억될 엔딩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흔의 이혼녀 윤자를 ‘미시즈 리’라고 호칭하는 정일은 미국 영주권이 필요한 스물일곱의 대학원생이다. 정일은 윤자와 위장결혼을 통해 영주권을 얻어야 하고 집 얻을 돈이 필요한 윤자는 정일과의 아슬한 동거를 시작한다.
윤자와 정일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윤자는 나이 든 여자가 젊은 남자에게 치근덕된다는 오해를 받을까 어른스러운 척 주저하고, 정일은 “그 여자에게 붙들리면 네 일생은 그만”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 그리고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윤자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위장 결혼을 끝낼 기한이 다가오고, 윤자는 용기를 내어 정일에게 같이 살자고 고백하지만 정일은 대답을 회피한다. 정일이 영주권을 받고 그들의 아슬한 동거의 마지막 날 둘은 바다에서 짧은 피크닉을 끝내고 돌아와 헤어짐을 앞둔다.
헤어지기 직전 문 앞에서 서성이던 정일은 몰아치듯 고백한다.
제가 결혼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윤자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간 정일을 현관문의 달린 자그마한 유리 구멍으로 훔쳐보며 윤자는 “온몸의 피가 아우성치듯” 들뜬 기쁨과 설렘, 자신의 약점, 언젠간 자신을 스쳐갈 정일에 대한 걱정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끝에 다짐한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힘껏 버텨보리라.
나는 마지막 윤자의 이 다짐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김지원작가_소설전집3 #물이물속으로흐르듯_소설집 #작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