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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Dec 21. 2020

우리 모두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 언제나 양해를 궁하는 양해중씨의 19가지 그림자(임소라)

   주문과 동시에 몇 시간 혹은 하루 만에 배송되는 책과는 달리 4일을 기다려 받았다. 생각보다 작은 사이즈와 얇은 책의 굵기에 당혹감을 느끼면서 가격의 부당성에 대해 생각하며 책장을 펼쳤다. 콤팩트한 사이즈에 콤팩트한 글들이 펼쳐졌다. 한 권을 다 읽는 데 걸린 시간은 네 시간. 정확히는 책에서 시선을 거두고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요즈음 몇 주째 억지로 시간을 들여 읽고 있는이언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보다 백배, 아니 천배는 재미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희대의 이야기꾼 이언매큐언 아니던가? ) 요근래 독서들을 떠올려볼때 좋은 책들은 많았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한 책은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임소라의 <언제나 양해를 구하는 양해중씨의 19가지 그림자>는 주인공 양해중씨의 주변인물들로 구성된 19가지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연작소설로 19명의 인물이 성폭력, 불법촬영, 노동문제, 10대폭력, 사기 등의 문제등에 놓이게 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숨쉬듯이 읽히면서 때때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깊이와 울림이 있다.


"나 때문에 마음 많이 상했지. 오늘 너랑 얘기도 제대로 못 했네."

그러게. 해중아, 나 임신했다? 확인하자마자 대현이네 집으로 옮겼어. 나는 있잖아, 이게 기회다 싶었던 것 같아. 집에서 나갈 기회. 엄마 아빠가 정해준, 언니의 간병인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날 기회. 덩치가 산만 한 아줌마의 몸 속에서 여섯 살 아이로 사는 언니에게서 영영 멀어질 기회. 나도 무서워. 내가 만약 언니 같은 아이를 낳는다면 엄마처럼 그렇게 키울 수 있을까. 언니에게서 도망가려다 언니를 낳는 건 아닐까. 언니가 없는 삶을 매일같이 상상했는데, 내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가정에서도 언니를 떼어놓을 수가 없어. 피임도 안 해놓고 기회라니, 한심하지. 나도 한심한데, 착각이겠지만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집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임신이 아니라 뭐라도 할 것 같아. 체질인가봐, 입덧도 안해.

나오지 않을 말들이 목까지 찼다.                                                                            
                                                                                                       -'채영의 초음파' (p.137)

   

   대학교 시절 시를 전공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유난히 하얗던 그 친구에게는 두살터울 자폐아 남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음울한 노래를 들었고, 사랑 받기를 원했으며, 축제분위기를 유독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친구가 별로 없었는데 나와는 음울한 노래를 들으면서 친해졌다. 어느 날은 팔에 잔뜩 멍이 들어서 왔는데 아버지가 없는 사이 발작을 일으킨 남동생을 진정시키느라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100키로에 육박하는 거구에 지능은 8살 아이보다도 못한 남동생과 집안에 둘이서만 남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했던 친구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천국을 믿지 않았다. 그 친구 집에서 딱 한 번 잔 적이 있었는데 친구는 화장실에 혼자 가지 말 것과 동생과 직접 대화하지 말라는 주의를 몇 번이나 줬다. 30도가 윗도는 더운 여름 밤이었는데도 친구는 방의 문이란 문은 모두 잠근 후 잠자리에 들었다. 후덥지근한 열기와 낯선 환경 때문에 쉽게 잠들 지 못하고 뒤척이다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방문 손잡이를 비트는 소리, 덜컹덜컹 창 틀이 흔들리는 소리에 나도 그녀의 어머니도 잠을 자지 못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처음 봤던 모습대로 많이 지쳐보였고 피곤해 보였다. 친구의 가족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일상적인 풍경이었고, 나는 그 낯선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여지껏 가난 때문에 다양한 사건들을 겪었지만 장애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고단함, 힘겨움, 버텨냄의 시간들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나만이 아프고, 피해자이고, 나만이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최초의 양해이자 이해였고, 멀게만 느껴졌던 장애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친근한 첫 만남이었던 셈이다.

   19가지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사회와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그림자들을 나의 코 앞까지 끌고 와 일상 속에 던져 놓는다.


  "좋아하면 안되는 사람 좋아하면 안 되겠지?"
  절대 아니길 바라는 소망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실눈을 뜨고 연 메일들은 모두 불합격 통지였고, 남동생은 일베였으며, 쯔쉬안이 좋아하는 사람은 성준이었다. 떡볶이 양념이 말라붙은 접시와 귤껍질들을 앞에 두고 쏟아지는 쯔쉬안의 말에 민지는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성준이 유부남이었다는 사실보다, 쯔쉬안의 말을 들은 직후 성준이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비교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더 놀랐다. '나한테도 연인 행세를 했다는 말을 하면 놀랄까? 내가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 사람 편을 들면 어쩌지? 쯔쉬안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얼굴이 하애졌다. 백지장 같은 얼굴로 성준과의 일들을 늘어놓는 쯔쉬안을 두고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다가 어느새 취했는지, 한순간 민지의 눈에는 쯔쉬안의 얼굴이 자기 얼굴처럼 보였다. 거울 속 자신이 빠져 있는 로맨스 혹은 불륜 사연은 웃기고 화가 나다가 점점 슬퍼졌다.
                                                                                                - '쯔쉬안의 케이스' (p.130)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성준이 준 휴대폰 케이스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는 중국인 유학생 쯔쉬안의 취중고백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온 성준이 유부남이고, 아이까지 있으며, 불륜 사기를 친 것이 자신 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민지의 웃기고 화난 그러나 결국엔 슬퍼진 얼굴을 떠올려본다. 슬프지만 단호하고 단호하지만 차갑지 않은 말투로 "그 사람, 나한테도 그랬어."라는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때의 민지 얼굴과 목소리를 상상하면서 나는 바보같고 멍청이 같아서 자신이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는 수많은 얼굴들을 헤아린다. 그 수많은 얼굴들 중에 유독 크고 뚜렷한 얼굴은 결국 '내얼굴'.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이지만 가끔 상태가 안좋아지면 결혼까지 할 뻔한 남자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나의 멍청함과 아둔함, 맹목적인 믿음에 대해서 나를 비난한다. 그 한 번의 실패가 모든 실패로 귀결되는 듯한 감정에 빠지면 꽤 오래 아프고 분노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 세상 모든 민지들에게 말하고 싶다. 너의 탓이 아니라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스치다 독감처럼 지독한 바이러스 앓았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독감에 걸리지만 누군가는 피해가는 것처럼 그저 그런 일 중에 하나였다고 양해해주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양해중이 무조건 방관자의 입장이 아니어서 좋았다. 친구에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무심코 내뱉는 실수도 저지르고,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가 때론 친구의 남편될 사람이 저지른 양다리를 눈감아주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며칠 후 해인은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새로 만들었다. 혹시 계정이 바뀌었거나 비공개일까봐 걱정했는데 그대로였다. 아이디 hyonamsun 계정에 새로 올라온 사진들을 확인했다. 연락처를 물어보겠다던 해중 언니는 신부와 신랑 사이에서 부케를 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빼곡히 선 하객들 중간중간 혜인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던 '릴'멤버들이 섞여 있었다. 혜인은 단 한 번도 필립이 잘 먹고 잘 살길 바란 적이 없었다. 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둘러싸인 필립을 보고 있자니,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자신의 행적이 할머니 말마따나 퍽 정성스러운 지랄로 느껴졌다.                                                             
                                                                                             - 혜인의 병아리콩(p.169)


   Couperin의 피아나 소곡집을 세시간 째 듣고 있다. 한 시간전 부터는 'Les Barricades Mysterieuses' 의 피아노 버전과 기타 버전 몇 개를 유튜브 재생목록에 걸어두고 반복해서 듣고 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지랄맞은 연애를 시작하면서 줄기차게 듣던 곡, 몇 년간의 짧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며 다사다난했던 연애를 끝내고도 다시 듣는데 이상하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그래, 나의 쿠프랭. 어떤 관계는 끝나도 찌질하고, 저속하고, 질척이게 상대가 쭈욱 잘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기도 한다. 나는 진심 혜인의 입장이 되어 양해중에게 섭섭함과 분노를 느꼈는데 아마도 그것은 쿠프랭의 연속듣기로 시작된 나의 추억팔이 속 그림자 때문이었으리라.


언제나 양해를 구하는 양해중씨의 19가지의 그림자는 나와 당신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꽁트 형식의 르포이고, 소설이면서 사실이다. 양해중씨는 지금도 나와 당신에게 양해를 구하는 중이다.


'당신의 그림자를 제가 좀 들여다 봐도 되겠습니까?'




* 쿠프랭의 기타 연주곡 "Les Barricades Mysterieuses" 신비한 이 밤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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