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학생이 된 딸은 나이에 비해 철이 빨리든 편이었다.
아빠를 이해하려 했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한 번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제는 딸에게 엄마가 생겼고, 평소 어른스러웠던 딸은 다시 아이가 되어간다.
내 딸이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는 아이인지 몰랐다.
그저 애교가 많은 아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나는 아빠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스킨십이 어색한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아이를 안아 준다거나 감정표현을 한다거나 이런 애틋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이에게 엄마가 생기고 엄마라는 호칭을 부르는 것이 좋은가 보다.
아빠보다는 엄마를 많이 찾고,
매일밤 잠자러 들어가기 전 엄마와 포옹을 꼭 하고 간다.
"나도 엄마 옆에서 자고 싶어."
이런 말을 종종 한다고 한다.
우리 딸은 엄마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랐다.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라온 아이는 분명 그 따스함이 다를 것이다.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엄마의 따스함만 할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엄마랑 스킨십을 하면서 자라지 않아서 좀 어색하긴 해요. 그래도 최대한 받아주려고 노력해요."
그 마음이 고맙다.
아마 우리 식구들 중에 우리 딸이 가장 애정표현도 잘하고, 애교도 많다.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받고 싶었을까?
이런 생각에 가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면 그 모습이 안타깝고 미안하다.
띠동갑인 동생이 생겨 버린 딸.
이제 엄마가 생겨서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마저 동생에게 양보하는 딸.
우리 부부는 이런 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훌쩍 커버린 딸은 자신만의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방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가끔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어색한 말을 일부러 건네지만,
예전처럼 쫑알쫑알거리는 모습은 사라졌다.
'아빠가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미안해 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딸과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