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연 이틀 하얀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어둡고 침침한 스산한 날들이 아닌 하얀 눈의 나라가 되니 기쁘지만 한편 이제는 겨울임을 부인할 수가 없어 길게 숨을 내쉬게 된다. 올 겨울도 잘 이겨보자, 옷장을 정리하고 핀란드에서 살다 보면 그 진가를 알게 되는 방한용품등을 챙기며 겨울채비를 하는 요즘이다.
겨울채비를 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멀리 한국에서도 친구처럼, 형제처럼 서로를 챙기던 이웃사촌이 모여 우리 가족 겨울채비를 함께 하고 있었다.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처음 본 그녀들이다.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부지런하고 야무진 엄마들 손을 거쳐 유난히 예쁘고 바른 아이들, 기묘하게도 남자 셋, 여자 셋 엄마들이 가까워졌다. 아이로 맺어진 관계는 아이가 커가며 깨지기 마련이라고도 하고 엄마들 관계에서 시기와 질투로 황당한 가슴앓이를 한다는 하소연도 많은 말많고 탈도 많은 아이로 맺어진 사이들이다.
운이 좋아서인지 나를 제외한 다섯 엄마 모두 심성이 예쁘고 바른데다 정이 많다. 내 위로 언니 둘, 동갑 둘, 두 살 어린 막내로 구성된 우리는 그 누구도 친밀감과 예의 사이에서 균형을 깨트리지 않았고 내 아이 기특하고 예쁘듯이 그녀들 아이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칭찬했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곁에서 돕고 챙기며 정을 쌓아 온 사이
내 무쇠솥으로 끓인 미역국을 먹고 자란, 처음 만날 당시 백일도 안되는 아기띠 속의 아가였던 그 공주님이 취학통지서를 받게 된 지금까지 언니는 동생들을 모아 멀리 사는 우리 가족을 위해 해마다 월동준비를 했다.
한참 히트텍 내의가 유행하던 시절, 미국의 우리 집으로 온 가족 내의가 몇벌씩 날아왔고 속옷과 먹거리 기모의류 등 해외에서 구하기 어려운 품목들을 살뜰히 챙겨 구호물자 수준으로 큰 박스에 가득 보내주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정이 들어도 허리를 다 펴고 서지 못할 정도의 택배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언니, 이젠 적응되서 없으면 없는대로 살 수 있어요.보내지마, 택비만 해도 얼만데
멀리서 전하는 나의 미안함과 반대는 공허하게 태평양위에서 사라지나 보다.
야, 쇼핑나갔는데 마침 기모바지가 나왔더라고 아직 철도 아닌데 벌써 나왔더라. 추운 데 있는 니 애들 생각나서 샀지, 내복은 있냐?
언니가 작년에 내복만 스무 벌 보냈쟎아, 평생 입어도 남겠수... 더 보내지마
애들 과자는 뭐 먹고 싶다하니?
과자는 안먹어도 그만인데 뭘 사서 보내... 있는거 먹고 살면 되니까 보내지마...
니가 과자 안사주자나! 그럼 내맘대로 산다?
이런 대화들 뒤에 날아온 커다란 상자 하나
우체국 소포박스 중 가장 큰 박스에 담고도 남아서 두 박스를 보내겠다는 것을 안받고 반송시키겠다며 말리고 말렸더니 조금이라도 더 담겠다고 물건들을 하나 하나 다 풀어 부피를 줄였다.
먹거리부터 방한용품까지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 대략 25킬로그램의 상자를 이곳까지 보내려니 운송료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택배비 무섭고 아까워... 뭐 이리 잔뜩 보내. 다들 고마워.. 내가 두고두고 은혜 갚을께!
야! 됐어 얘, 그저 애들이랑 건강하게
거기서 잘살기나 해!
저 컵라면은 누가 했어... 한 봉지에 다 붓지 힘들게 하나하나 다 따로 담았어......
어우야, 저건 미리가 했어
말랑카우는 누구 작품이야, 무슨 사탕이 이리 많아
누구긴 으니여사 작품이지
도시락김이랑 반찬을 잔뜩 샀는데 넣을 곳이 없어서 못보냈어. 아 아쉬워 어째
두고 먹음 되지.... 언니들이 먹어
야! 우린 여기서 아무때나 사먹음 되지..거긴 없쟎아, 보내는 김에 다 보내줘야 하는데
얘, 쟤는 과자 많이 못샀다고 지가 굳이 택배비를 더 낸다고 해서 더 냈어. 여럿이 갈라서 내니 무거워도 얼마씩 안해, 택배비 신경쓰지마
박스가 날아온 뒤 뒷얘기도 끊이질 않는다.
저렇게 큰 박스를 가득 채워 보내고도 미쳐 못보낸 것들이 생각나 아쉽고 애가 타는 모양이다.남이지만 남같지 않은 고마운 인연들이다.
덕분에 길고 추운 겨울이지만 따뜻하고 든든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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