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전과 콩비지로 든든한 겨울나기
지난 오후부터 저녁내, 그리고 밤새도록 맑은 물에 불렸으니 충분하겠지? 조심스레 체에 걸러 검정 보자기를 덮는다.이번에는 제발 싹이 나기를...
사나흘이 넘도록 아무리 정성스레 물을 부은 뒤 보자기를 덮고 기다려도 싹이 나기는 커녕 점점 물러터지기만 하는 노란 콩나물콩
충분히 불리지 않았었나? 물에 불리는 시간을 늘려 보았다. 물이 양이 부족했나? 물을 좀더 자주 주고 충분히 담구어 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차례...결국 콩나물콩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물러가더니 차츰 썪어갔다.
콩나물을 길러먹겠다고 배에 싣고 온 콩나물콩이 이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만큼 생명력을 잃은 모양이다. 콩나물콩 안의 마지막 한 숨까지 다 말라 다이상 싹을 틔울 수 없는가 보다.
일조량이 적어 감자와 당근을 제외하고는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척박한 곳에서 콩나물이라도 길러 무침도 하고 국도 끓일 수 있어 행복했는데 이젠 어쩌나...
아직도 그득하게 쌓인 콩나물콩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이상 콩나물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고 남아 있는 콩나물콩을 어찌해야 하나 막막하다.
어제 오후부터 콩나물콩을 물에 불렸다. 싹을 틔우고 콩나물로 등장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충분히 불린 콩을 블렌더에 넣고 곱게 갈아본다. 양파와 당근을 곱게 다지고 계란을 하나 풀어 소금간을 해준뒤 후라이팬에 지글지글 콩전을 부쳐본다.
집 가까이 예술의 전당 맞은 편에 자주 들르던 두부요리전문점이 있다. 십여년 전부터 줄서서 먹던 맛집인데 남편과 나는 두부전골과 콩전을 시켜 먹곤 했었다. 그때 먹던 콩전맛의 기억을 더듬어 조리용 기름을 두르고 조심조심 콩전을 부쳐냈다.
몇 장 부쳐내고도 큰 국자로 서너국자쯤 콩간 것이 남았다. 뽀얗고 걸쭉한 것이 마치 두부으깬것처럼 고운 결을 내보이며 덩그러니 남아있어 마저 요리를 해낼 요량으로 잘익다 못해 시어꼬부라진 김치를 꺼내 잘게 썰었다. 고기 간 것도 없도 콩나물도 없지만 비지찌개를 끓일 셈이다.
내가 사랑하는 무쇠솥에 시어머니께서 직접 짜서 챙겨주신 들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들들 볶았다. 곱게 간 콩을 육수와 함께 붓고 끓이다 새우젓으로 간을 했다. 핀란드에 온 뒤 처음으로 내 부엌에서 비지찌개를 끓인 셈이다.
오랫만이구나, 콩비지찌개
내 부엌 인덕션에서는 끓여낼 수 없어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뚝배기를 꺼냈다. 국자로 듬뿍 퍼담으니 제법 먹음직스럽다. 청국장도 비지도 뚝배기에 담으면 유난히 맛나 보인다.
한참을 잊고 있었네, 정말 맛있구나.
뚝배기의 맛깔스러운 멋도,
콩전과 비지찌개의 맛도
오늘은 영하 17도, 바람을 감안한 체감온도는 영하26도로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 목요일이다. 한동안 평년과 달리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며 춥지 않은 날씨에 도리어 호들갑을 떨던 핀란드사람들이다.
모처럼 핀란드다운 추위가 찾아온 목요일에 우연치않게 우리 가족은 콩전과 콩비지찌개로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다. 핀란드사람들은 목요일에 pea soup을 먹어 왔다. 그래서인지 식당의 메뉴를 보면 목요일엔 늘 콩스프가 나온다. 학교 급식에도 목요일엔 콩스프가 자주 나온다고 한다. 금요일 금식기간을 고려해 목요일에는 든든하게 먹어두는 풍습이 전해진 것이라는데 고작 콩스프로 든든해질지 의문이다.
고기간 것, 묵은지 등 재료를 듬뿍 넣고 구수하게 끓인 콩비지찌개로 진짜로 속이 든든해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이제는 싹을 틔우지 못하는 콩나물콩이 엄청 많이 남았는데... 앞으로 몇장의 콩전과 몇그릇의 비지찌개를 끓여먹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