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스 Jan 13. 2017

파리, #1 위고의 집, 위고의 자취를 따라가 본다

위고의 집

내가 어렸기 때문에 혹은 비겁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감지하지 못했던 혁명의 기운이 거칠게 몰아치는 요즘이다. 촛불이 넘실대는 거룩한 장면을 보도로 접하며 가슴에 울리는 노래가 있었으니 비단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Do you hear people sing
Singing the song of angry men
 It is the music of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https://youtu.be/gMYNfQlf1H8



영화로, 뮤지컬로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어릴 적 읽었던 소설의 제목으로는 장발장, 어린 조카를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치다가 감옥에 갔던 그는 여러 번의 탈출시도 탓에 19년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지는 소설 장발장의 소개멘트지만 당시 어렸던 내게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먹을 것이 없어 빵을 훔친다고? 그런 일로 감옥을 간다고? 그냥 빵 한 덩이 주면 되자나!!!!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고? 무려 19년???? 사회의 빈곤층에 대해 인식도 없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역겨움도 몰랐던 어린 아이에게도 불합리한 것들 투성이었던 석 줄의 문장, 이후 원제인 Les Miserables는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참한 하층민의 삶, 누군가는 그들을 가리켜 개돼지라 했다.


1892년  프랑스에서 쓰여진 작품이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어서 가슴 아프고 여전히 비참한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빵 한덩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반문해 본다.


최근 휴잭맨이 연기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빵 한 덩이를 훔쳤을 뿐이오" 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 빵이 그냥 빵 한 덩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사진 출처 : 리치몬드 과자점

장발장이 훔친 빵은 깜빠뉴라는 유럽에서 주로 먹는 빵으로 반죽에서 부터 굽기까지 4시간이상이 소요되는 빵이다. 만드는 과정에 따라 3일이상이 걸리기도 한다는 깜빠뉴. 게다가 집집마다 오븐이 갖추어져 있지 않던 그 시절에는 마을 단위로 화덕을 갖추어 마을 전체가 먹을 빵을 한 번에 구웠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빵의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컸다고 한다. 장발장이 훔친 빵 한 덩이가 바로 이 어마어마하게 큰 빵 한 덩이이다.


제아무리 큰 빵이고 만드는 데 오래 걸린다 해도 초범이고 반성도 충분히 했는데 빵 한 덩이로 5년을 선고했다니 진실로 억울한 일이다.


징역5년의 억울함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도 징역5년을 선고받았고 현직 부장판사에게 뇌물 청탁한 정운호 전 대표도 징역5년을 선고받았다.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탈출을 여러 번 시도해 형량이 늘었다지만 장발장은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어린 소녀를 강간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대하며 고통에 몰아넣은 조두순이 최종적으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라는 점을 볼 때 죄의 경중과 상관없는 형벌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가난한 하층민이었기에 더욱 가혹했던 법집행과 현실, 장발장이 겪어야 했던 사회의 부조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레미제라블은 소설로, 영화로, 뮤지컬로 사랑받고 있다.


2012년 겨울이던가 2013년 봄으로 기억하는데 정성화씨가 장발장을 맡아 열연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가족이 함께 관람한 적이 있다. 오페라 유령과 더불어 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 레미제라블 덕분에 딸들은 관람직후 밟은 미국땅에서 기죽지 않고 영어노래를 부르며 영어실력을 쌓아갔다. 낯선 미국땅, 익숙한 것 하나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하루종일 들려오던 레미제라블의 노래들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뉴욕여행중 자유의여신상을 보러 가는 페리에서 프랑스인 가족을 만났다. 갈색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두 딸과 밝은 미소의 엄마, 로맨틱하면서도 젠틀한 느낌의 아빠는 우리 가족과 이내 친해졌다.


두 딸의 부모로서 서로의 딸들을 바라본 덕분이겠지. 어쩌면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자락을 우아하게 손끝으로 잡고 무릎을 구부려 살짝 고개를 까딱하는 그녀들의 인사에 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때 페리에서 위고와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들은 여전히 레미제라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 프랑스에서 온 가족과 나눌 이야기 주제로는 이만큼 완벽한 것이 또 있으랴!


물론 한국식으로 발음한 위고와 레미제라블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해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어 발음은 참 아름답지만 따라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들의 프랑스 귀국 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우리가 나누었던 위고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말을 맞아 위고의 집을 방문했다며 큰 딸아이 레오니으으~~음이 사진 몇 장과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때였을 것이다. 딸아이의 버킷리스트에 위고의 집 방문하기가 오른 때


위고의 친필 습작들


Victor Hugo는 10대 초중반의 나이에 대문호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으니 그는 그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적었다 한다. 샤토브리앙은 루소,밀턴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던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이자 정치가이다. 어린 시절 위고는 샤토브리앙에게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이후 위고는 당시 고전파가 지배하던 문단에 맞서 낭만주의 운동을 전개했으며 젊은 예술가들을 모아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희곡 크롬웰에 붙인 서문으로 낭만주의 연극이론을 선언하고 7월 혁명이 일어났던 그해에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조의 분수령이 된 에르나니투쟁 이 일어난다. 이 투쟁에서 승리한 위고는 낭만주의의 시대를 열었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에도 입성하게 된다.


위고는 나폴레옹3세의 쿠테타에 반대하여 국외로 추방당하는데 그 이후 장장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장발장도 19년간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위고의 심정이 녹아든 것일까, 위고의 망명생활 중인 1862년에 레미제라블이 집필되고 그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한 1870년이니 아마도 우연이리라



여전히 민중은 고통받는 현실속에서 까도 까도 끝없이 드러나는 가진 자들의 악행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소리로 외치게 된다.


물러나 죗값을 치르라, 정권 교체하여 새로운 민중의 사회를 건설하라!


오늘도 염원을 담아 파리, 위고의 집 방명록에 흔적을 남긴다.



Masion De Victor Hugo 위고의 집


Address : 6 Place des Vosges, 75004 Paris,


혹자는 가장 파리다운 거리라 격찬하는 마레지구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작은 공원 곁에 위치한 위고의 집에 도달한다. 영화 미비포유를 재미있게 본 딸아이가 미비포유 향수가게에도 데리고 가달라 해서 시청역에서 내린 뒤 마레지구를 관통하여 위고의 집을 향해 걸었다. 도보거리가 조금 되지만 거리구경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어 걸을만 하다.


아빠에게 향수를 선물해 주고 싶다던 딸들은 가격표를 확인한 후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아빠에게는 향수 사진만 전했다.


파란 푯말이 보이는 벽안쪽에 입구가 있다

 처음에는 공원을 둘러싼 건물이 모두 위고의 집인가 착각해서 위고아저씨 대단한 부자셨다며 딸들과 농담을 했다. 공원을 바라보고 오른쪽 코너에 위고의 집이 있다. 위고의 집 입장은 무료이며 특별전시의 경우에 한하여 입장권을 구입한다. 물론 특별전시중이어도 위고의 집에만 입장하는 것이 가능하니 관심없는 전시면 무료입장을 하겠다고 데스크직원에게 이야기하면 된다.



뉴욕에서 만난 레오니으으음 가족 이야기는 요 아래에서 꾸욱


https://brunch.co.kr/@lifeinfinland/99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 오페라의 유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