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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Oct 26. 2017

#2 강건왕과 러시아의 표트르1세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왕이 사랑한 보물

아우구스트2세는 폴란드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하면서 폴란드 왕좌를 계승할 후보 중 한 명이 되었다. 폴란드의 왕권은 의회의 허가하에 행할 수 있는 매우 약한 왕권이었으며 선출직이었다.백여년 전인 1573년, 폴란드 국왕의 비서였던 얀 자모이스키가 모든 귀족들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하여 국왕을 선출하도록 하는 안을 관철시킨 바 있다. 덕분에 인접국인 작센의 제후도 폴란드의 왕좌를 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트2세는  뒤 폴란드 왕좌의 후보가 되기 위하여 개종을 하는데  그는 종교가 다른 인접국, 작센의 제후였기 때문이다. 개신교를 믿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자 루터교를 믿고 있던 작센의 주민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심지어 그의 아내는 호엔촐레른 왕가출신이었는데 호엔촐레른 가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 왕, 프랑켄계 독일황제, 호엔촐레른 공국의 통치자인 수바벤계 루마니와의 왕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런 가문출신인 아내는 폴란드의 국왕이 되겠다며 후보에 오르기 위해 개종까지 한 남편을 떠나게 된다.


이쯤되면 아우구스트2세가 폴란드의 왕좌에 얼마나 욕심을 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하여 귀족들을 포섭했고 폴란드 국경지대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위협을 가한 결과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된다. 인접국의 제후가 왕으로 선출되자 폴란드인들이 크게 반발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투스2세는 자기에게서 등을 돌린 작센지역의 주민들의 마음과 자신을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폴란드인의 마음을 동시에 잡아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물론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맞설 외부의 적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우구스트2세는 유럽 공공의 적이었던 투르크에 대항하는 대투르크전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 우크라이나를 획득하였다. 물론 당시 유럽은 수만 가지의 전쟁명분이 그야말로 창궐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스웨덴의 점령지였던 리보니아를 되찾기 위해 덴마크,스웨덴과 대스웨덴 동맹을 맺었다. 리보니아는 스웨덴 점령 이전에 폴란드영토였다.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즉위하면서 러시아, 폴란드를 제압하고 30년 전쟁을 통해 가톨릭연합을 상대로 전승을 하며 유럽의 강자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에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여 지배했으며 칼 10세 구스타브시기에 폴란드와 덴마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리보니아와 스코네 일부 지역을 획득한 것이다. 아우구스트2세 어머니의 나라이기도 했던 전통의 북유럽강호 덴마크는 아우구스투스2세와 손을 잡지 아니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역시 바다로의 진출을 위해 발트해인근으로 힘을 뻗치고 싶었으며 서유럽화를 갈망하는 처지이다 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폴란드 국회는 아우구스트2세와 이 연합을 후원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의 군대는 칼 12세의 스웨덴에 패하여 크라쿠프 동북부에서 밀려났다.


그로 부터 2년 뒤 아우구스트2세는 작센으로 달아났는데 또 2년 뒤인 1706년 스웨덴 군의 침입을 받게 된다. 칼 12세 맞설 힘이 없었던 아우구스트2세는 알트란슈테트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는데 1709년 러시아가 스웨덴을 물리치면서 이틈에 아우구스트는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스웨덴은 북방전쟁에서 러시아의 표트르대제에게 대패하여 오랜 전쟁으로 이미 기울기 시작한 국운의 끝을 보게 되고 스웨덴의 영향아래 있던 지역들은 러시아의 영향아래로 재편입된다. 이 무렵 핀란드 역시 스웨덴의 식민지에서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이 되었고 수도를 러시아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곳이 오늘날의 핀란드 수도 헬싱키이며 스웨덴 통치시절까지 핀란드의 옛수도였던 뚜르크(Turku)가 내가 사는 도시이다. 실제로 뚜르크는 해로를 통해 스웨덴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곳으로 핀란드 여행을 온 많은 사람들이 헬싱키가 아닌 뚜르크에 들러 반나절 관광을 하거나 인근 난딸리를 둘러 본 뒤 배를 타고 스톡홀름을 향해 떠나기도 한다.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북유럽일대의 힘의 균형이 이동하는 와중에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아우구스트2세는 본의 아니게 표트르1세(표트르 대제,피터 대제라고도 불리운다)의 은혜를 입게 된다


표트르 1세가 국회로 하여금 아우구스트2세를 폴란드의 왕좌에 회복시키도록 후원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아우구스트2세와 폴란드의 반체제 귀족사이의 분쟁을 하결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트2세는 표트르 1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표트르1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아우구스트2세가 보낸 그림선물이 포르노그림이었다는 것은 지난 이야기에서 했다나 뭐라나, 표트르1세도 그 그림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으로 보아 표트르1세 역시 만만치 않은 난봉꾼이었을 거라고도 수군수군


난봉꾼 강건왕이야기는 아래 꾹


https://brunch.co.kr/@lifeinfinland/516


국립중앙 박물관의 전시와 관련된 '왕이 사랑한 보물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대문사진은 표트르1세 (출처 위키피디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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