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택, 나를 위한 싸움의 방법, 미하엘라
20세의 레이카는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이따금씩 가족들을 만나고 싶으면 이걸 타고 집에 오라고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해주신 선물이었다. 자전거 뒷자리엔 키우던 앵무새를 놓았다. 앵무새는 새장 속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앵무새를 저 집에 혼자 남겨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빈손이었다. 자전거 바퀴를 굴렸다. 그렇게 레이카는 엄마가 주신 자전거를 타고 앵무새 한 마리만을 챙겨 늙은 남자의 집에서 몰래 도망을 나왔다. 19세에 가족의 손에 강제 결혼을 해야 했던 레이카는 문을 열고 나와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까지 페달을 멈추지 않은 채 곧장 달아났다. 결혼 1년 만이었다. 다시는 늙은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가 너를 혼자 키우셨다고 했지?” 미하엘라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첫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미하엘라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의 이야기다.
앵무새를 뒤에 싣고서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며 열심히 두 다리로 자전거 페달을 구르는 젊은 여성이 내 눈에 마치 영화처럼 그려졌다. 겨우 스무 살이었다니.
“아,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나의 말에 미하엘라는 대답했다.
“응, 그 광경을 종종 상상해보곤 해. 젊은 시절의 엄마, 내가 언젠가는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
빈곤했던 가족은 다섯째 아이였던 레이카를 나이 많은 부자 남자의 결혼 상대로 짝지어 주었다. 겨우 19세였다. 가난한 가족은 어떻게든 입 하나를 줄여야 했다. 하루에 빵 한 조각 먹기도 쉽지 않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레이카와 언니는 들판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와야 했다. 때로는 풀을 뜯어오고 버섯을 캐기도 했다. 그걸론 수프를 끓일 수도 없었다.
가족들은 이 결혼이 그들을 가난에서 구원해 주리라 기대했다. 결국 레이카의 오랜 연인이었던 청년과 그녀를 기어이 찢어놓았다. 청년이 너무나 가난했기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레이카에게 닥친 결혼 생활은 문자 그대로 비극이었다.
“엄마에게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었다는 거지. 그녀는 알고 있었어.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맞섰어.”
숨 가쁘게 자전거 페달을 굴러 집으로 돌아온 레이카를 가족들은 천대했다. 그녀의 존재는 가족들에게 불명예가 되어 있었다. 부모의 얼굴에 기어이 먹칠을 해가며 겨우 스무 살 나이에 이혼녀가 되어 돌아온 그녀는 ‘천한 여자’라고 불리며 온 친척들에게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미하엘라는 자신의 엄마가 가족들에게 평생 ‘black sheep’ 취급받았다고 표현했다. 나의 눈을 응시하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평생.”
‘검은 양’은 주로 가족의 평판을 떨어뜨린, 남우세스러운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전통적인 크로아티아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20살의 이혼녀는 모두에게 불편한 상대가 되었다. 때는 아직 1970년대였다.
하지만 7년 뒤, 가족에게는 더욱 경악할만한 일이 벌어진다. 식구들에게 이미 껄끄러운 존재였던 27세의 레이카가 사귀던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남자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나니, 그는 그 즉시 임신 중절을 요구했다. 2년 동안을 교제한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주변을 감쪽같이 속여온 유부남이었다. 결혼반지를 빼고 다니며 2년을 넘게 사기 행각을 벌였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남자는 임신한 레이카를 압박했다.
남자는 곧이어 산부인과 의사와의 약속까지 잡아놓고 레이카를 병원으로 이끌고 갔다. 병원 진료실에서 의사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진심인가요? 정말로 낙태를 원하나요?”
“아니오.”
레이카는 남자의 눈을 피해 황급히 산부인과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었다.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수적인 크로아티아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28살의 미혼모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출산을 한다. 10분 간격으로 태어난 이란성 여자 쌍둥이였다. 늦지 않게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남자는 아이들을 자신의 법적 호적에 올리기를 거부했다. 자신은 아이들의 출생에 법적 책임이 전혀 없으며 ‘부성’으로서 자신의 가족성을 물려주지 못하겠다고 했다. 레이카는 두 번 다시 그 남자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엄마는 출산 후 2달이 지나자 우리에게 유아세례를 해줄 신부님을 찾아 근방의 온 성당을 찾아다녔어. 우리를 품에 안고 말이야. 모두가 거절을 했다지. 법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유부남의 아이들을 낳은 엄마를 모두들 문 밖으로 돌려보냈다고 해. 신성한 우리 교회에서는 혼외 자식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했대. 그러다가 어렵게 단 한 명의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어. 선뜻 우리에게 유아세례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분이 유일하게.”
가족에게도, 교회 안에서도 축복받지 못한 미혼모의 두 아이, 여자 쌍둥이 중 한 명이 나의 동료인 미하엘라다. 엘리트 의식으로 꽉 찬 국제기구에서 그는 무언가 튀는 면모가 있었다. 영어와 불어에 모두 능통하고 회의 때마다 때로는 공격적으로 자기 의견을 풀어낼 줄 아는 총명한 미하엘라는 자신이 미혼모의 아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숨기지 않았다. 몇 년 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등장한 진실이라 오히려 나는 더 이상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연 속에 켜켜이 얽힌 엄마의 스토리들을 본격적으로 듣게 되다니 이 자리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독립적이고 명석한 딸을 키우셨을까. 상상도 못 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서 말이다.
내 앞에서 또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를 나는 다시 응시했다. 키가 커서 성냥개비처럼 길쭉하고 빼빼 마른 미하엘라는 눈이 엄청 크고 깊어서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새까만 흑발에 왼쪽 이마 위로는 하얀 머리카락을 몇 가닥 브리치를 해놨다. 자전거 페달을 구르는 스무 살 레이카의 모습을 나는 인터뷰 중 자꾸 낭만적으로 상상해보게 되었다. 철없게도 나는 레이카를 몹시 응원하고 있었다.
“너희 엄마는 정말 용감한 분이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힘든 길을 선택하고 다시 세상을 씩씩하게 헤쳐 나와 너를 이만큼 잘 키우셨네, 20살의 레이카가 너무 장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온 앵무새까지도.”
“엄마는 자신이 결정한 선택의 대가를 평생에 걸쳐 지불해야 했어. 취직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불가능했어. 70년대에 처녀가 혼외 임신을 한 거잖아. 어딜 가나 나쁜 소문이 났고, 누군가에게 차마 아는 체하기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지. 면전에 대고 비난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어린 나이에 이혼을 했고 감히 유부남을 꼬여낸 ‘싼 여자’가 되었으니. 그리고 큰 이모는 우리가 두 살이 될 때까지 우리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어. 같은 마을에 서로의 집이 지평선 안에 보일 정도로 지척에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쌍둥이 아이들이 두 살이 되자 기어이 레이카는 아장아장 걷는 두 딸의 손을 양손에 각각 잡고서 큰 언니의 집으로 향한다. 이제 내 아이들을 만나보라고. 이야기를 듣던 나는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졌다. 미혼모가 된 딸과 아빠도 없는 아이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친정으로 당당히 찾아간 레이카의 용기와 비범함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가난한 삶은 뾰족한 방법도 없이 지속되었다. 아이들은 커가고 있었고 전기세가 몇 달째 밀렸다. 답이 없었다. 사회보장 제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에 동유럽에서 한부모 가정이라니, 과연 고단한 삶이었다.
“곧 전쟁이 터졌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내전이었어. 우리 집은 국경선의 마을에 위치했었어. 이웃 간에 밀고를 하고 누군가는 붙들려 갔어. 위험한 상황이었지. 집에는 외할머니를 포함해서 여자들만 4명이 있었어. 정말 정말 무서웠어. 엄마가 신경쇠약이 걸릴 지경으로. 세 여자를 자신이 보호해야 하니까. 우리는 그때 11살이었어.”
개인의 가족사를 청해 듣던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큰 방지턱을 만난듯한 기분이었다. 순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전쟁? 전쟁이라니.. 나는 발칸 반도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인물을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과 민족 간 갈등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한밤 중 누군가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려대는 일들이 빈번했다. 창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현관 걸쇠를 단단히 걸어놓았지만 하룻밤도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날이 없었다. 나아질 기미를 찾지 못한채 가족은 더욱 가난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