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저작물 창작 공모전 응시작/메밀꽃 필 무렵
#1
'자나 깨나 여자 조심해야 한다.'
지겹도록 들어온 그 소리는 눈먼 노파에게서 시작됐다. 어쩌다 어머니가 그토록 경시하던 천 것의 말을 맹신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그로 인해 내 삶은 사기꾼 노파에게 종속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미신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다 그 탓이었다.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꼭 가야겠느냐?"
"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양보해드리고 싶지만 오늘이 장이 열리는 마지막 날이라서요."
"그 노파가 보름달이 둥글고 선명하게 뜬 밤을..."
"조심하라고 했다지요? 가뜩이나 지지리도 외로운 팔자로 타고났는데, 이런 밤에 여자랑 잘못 엮이기까지 하면 마음 앓이하다가 속이 새카맣게 썩어 문드러져서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도요?"
장난스러운 태도에 어머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금방이라도 훈계를 쏟아내고 싶지만 꾹 참는 기색이 여력 했다.
"가벼이 흘려듣지 말거라. 약속하지 않았느냐. 자나 깨나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는 스님이 될 팔자니까요."
"무슨 그런 말을! 네가 허 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데!"
"여자를 조심해 가면서 대를 잇는 방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 노기가 먹구름처럼 드리웠다.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꼼짝없이 붙잡힐 게 분명했다. 인사와 동시에 잽싸게 집을 나섰다. 대문 밖에서도 어머니의 걱정이 선명했다. 걱정 말고 주무시라 외치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 어머니는 밤새 바깥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잠들지 못하리라. 죄책감이 가슴 한편을 쿡쿡 찔렀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제 아무리 자식 일에 이성을 잃는 게 부모라지만, 사기꾼이 한 말에 여즉 휘둘리다니. 모성이란 어찌나 어리석은가. 졸지에 자유를 박탈당한 내 처지는 또 어떤가. 양반 신분인데도 우리 집 노비들보다 못한 신세인데. 그들은 봄꽃이 보고 싶다 하면 개나리를 꺾어다줬다. 여느 집 담장에서 보고 온 양반꽃이 예뻤다며 어떻게 생겼는지 열심히 설명해 줬고, 가을꽃은 뭐가 있냐 물었을 뿐인데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밭에 몰래 데려가줬다. 새장 속에서는 내 힘으로 세상을 넓힐 수 없어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그들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내 사랑의 크기가 작지 않아, 부단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그 기대에 영원히 부응할 수는 없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딱 한 번, 첫 발만 떼면 해방될 수 있다. 나도, 어머니도.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새장 밖에 나를 내던졌다.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짜릿했다. 그간 누리지 못한 만큼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내가 햇빛을 과하게 쬐면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체질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따가움마저 즐거워서 미친놈처럼 웃음이 났다. 물론 여름볕에 온전히 놓이는 무모한 외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노파의 말을 무시하는 걸로 모자라 피부에 발진까지 나자 어머니가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여름날에는 전처럼 숨죽여 지내야 했다. 괜찮다. 여름이 가도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선선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기에.
#2
밤나들이가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들뜬 건 나뿐만이 아닌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꽃처럼 설렘이 피어있다. 봄철 꽃가루처럼 저마다의 행복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햇빛 때문에 통 가기 힘든 낮 장터도 아니고, 익숙한 밤 장터가 왜 새삼 새롭게 느껴질까? 은은하게 빛나는 초롱 때문인가? 아니면 휘영청 둥근달이 태양 같아서? 이유는 몰라도 그날따라 마음이 활짝 열려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것들에 관심이 갔다. 가령 달아서 입에 댄 적도 없는 주전부리를 맛본다거나, 필요도 없는 여인의 장신구를 구경한다거나. 이 장면을 어머니가 본다면 추궁 세례가 이어질 테지만, 순전히 예뻐서였다.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연애는커녕 여인과 손 한번 잡아본 적 없으면서. 곱게 간 자개를 덧입힌 비녀에서 눈을 뗄 수 없다니, 참 웃긴 일이다.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이게 요즘 한양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물건인데 어렵게 구해왔습죠."
불시에 건네온 영업에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적당히 둘러대고 벗어나려는데 질세라 상인이 비녀를 디밀었다.
"비녀가 임자를 찾은 것 같은데, 한 번 착용이라도 해보시지요!"
체질 탓에 해를 가까이하지 못해 흰 피부, 외탁을 해서 곱상한 얼굴이 여자 사촌들의 부러움을 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인으로 오해받은 적은 없었다. 누가 봐도 어엿한 사내에게 비녀라니!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때 섬섬옥수 같은 손이 시야로 들어왔다. 거칠고 투박한 상인의 손에 있던 비녀가 제 주인을 찾아갔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그곳에는 곱게 간 자개를 쏟아지는 달빛에 빚은 것 같은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 능숙하게 비녀를 꽂았고, 상인의 너스레가 뒤따랐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여인을 제외한 모든 것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자다가도 욀 정도인 어머니의 당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3
어쩌다 단 둘이 있게 된 걸까? 기억이 단편적으로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예까지 온 과정이 희미했다. 그간 죽은 듯 지내던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숨을 고르다 보면 차분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제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려대는 걸 보면. 하지만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내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제발 진정하라고 애원하며 숨을 고를 뿐.
문득 호흡이 의식의 영역인지 무의식의 영역인지 의문이 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호흡을 인식한 적 없는 걸 보면 무의식임이 틀림없는데, 이상하게 부러 숨 쉬지 않으면 숨 쉬기를 잊을 것만 같았다. 점점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졌다. 한쪽의 감각이 깨어나면 나머지도 연달아 눈 뜨듯, 심장은 폭주 중이고 숨은 가쁜 데다 얼굴에는 열이 잔뜩 올랐다. 그녀를 쳐다봐야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숨 쉬는 걸 잊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과부하 걸린 심장이 마침내 터져버리거나. 어느 쪽이건 감당하기 벅찰 만큼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때 시종일관 아래를 향하던 눈길이 똑바로 내게 향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가 웃었다. 얇게 벗겨낸 자개를 눈에 씌우기라도 한 건지 세상이 온통 반짝였다.
"나리께서 저와 여기 온 이유는... 지금 저를 뚫어지게 보는 이유와 같겠지요?"
목소리가 너무 달아서 귓가에 채 닿기도 전에 녹아 없어졌다. 보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훤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찌 답을 하겠는가. 불가항력이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것이.. 무슨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그게.. 너무.. 고와서.."
뭐가 그리도 웃기는지 청아한 웃음소리가 방을 메웠다. 다시 주워 담고 싶어도 이미 흩어진 말을 그러쥘 방도가 없어서, 그저 멍청한 놈이라고 자책하는 수밖에.
"제가 그렇게 예쁩니까?"
"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님 같습니다.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워서.. 말로만 듣던 구미호에 홀린 건가 싶을 정도로요."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 위로 서늘함이 스쳤다. 하지만 너무 찰나여서 반쯤 얼이 빠진 나는 감지하지 못했다. 뭐, 알았다 하더라도 이미 무장해제 돼 저항할 수 없었겠지만.
"그러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간이라도 빼 먹히면 어쩌려고요."
"다 옛날 사람들 헛소리죠. 어머니 덕에 미신에는 이골이 나서요."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요?"
"자나 깨나 여자 조심해야 한다. 특히 보름달이 둥글고 선명한 밤을 경계해야 한다. 원래도 지지리 외롭게 살 팔자인데, 이런 밤에 여자랑 잘못 엮였다가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낼 거라고 말입니다."
어머니의 더없이 진지한, 그래서 더 엄살처럼 보이는 말투를 흉내 냈다. 그녀의 표정에는 완벽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황급히 덧붙였다.
"어릴 적 시장에서 본 사기꾼 노파의 말에서 시작됐죠. 어머니의 염려가. 덕분에 수도승 같은 삶을 살게 됐고요. 뭐, 엄밀히 말하면 어머니 탓만은 아니지만요. 딱히 눈길 가는 여인도 없었거든요."
"어머니가 과보호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랬었다. 아마 이 밤이 더 빨리 찾아왔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그간 어머니의 경고가 와닿지 않았던 건 순전히 그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세상에 이런 여자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어머니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그녀 앞에 서면 모든 걸 다 내어줄 테니까. 응당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그녀에게 자개 비녀를 줬던 것처럼.
"전혀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확히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일지라도, 그로 인해 당도하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게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달이 구름에 먹혔는지 방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향할 수 있었다. 고래들이 해마다 대양을 건너듯, 때마다 철새들이 먼 길을 떠나듯, 배우지 않아도 그렇게 자연히. 최초의 인류가 제 흔적을 세상에 남겼던 것처럼.
#4
누군가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벌써 해가 떴나 싶을 만큼 환한 방이 보였다. 그녀는 문가에 뒤돌아 서있고, 내 위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있다. 밝은 방과 대조되는 그녀의 그림자가 이질적이어서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드시군요. 어쩌면 믿지 않는 자에게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무.. 무슨.."
"이제 환한 태양빛보다는 달빛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질보다는 그 아래 드리운 어둠을 보며.."
"통.. 영문을 모르겠는 말만.. 윽.."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요. 그럼 안녕히.."
사뿐히도 내딛는 발걸음에는 어떤 여운도, 미련도 없었다. 그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 혼을 쏙 빼놨던 것처럼 갈 때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모든 게 환상이었던 건 아닐까? 목을 졸리다 보면 어느 순간 의식이 몽롱해지듯, 급격히 몰려오는 졸음에 나는 까무룩 지고 말았다.
잠에서 깼을 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젯밤 일은 전부 꿈이었나? 그녀의 존재도, 그녀와 나눈 밤도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기분이 들떠 과음을 하고 뻗은 쪽이 더 그럴싸했다. 그런데 왜 지난밤의 감각은 현재처럼 생생한 걸까? 꿈이라면 그 뒷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아릿할 수 없을 텐데. 하지만 여운 외에 그녀가 현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와 연결됐었다는 유일한 증거이자 내게 채워진 새로운 족쇄는 내 안에 남아 매 순간 그녀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후회했다. 나를 병신으로 만든 그녀를 그렇게 보낸 것을.
#5
어머니가 옳았다. 어리석은 건 똑똑한 척 어머니의 우려를 미신 취급 하던 나였다. 차라리 미쳐버렸다면, 아니면 불구가 됐더라면... 어느 쪽이건 이보다는 나으리라. 그림자로부터 위협당하는 저주라니. 나조차도 믿기 힘든데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온전히 혼자서 짊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더 외로웠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왜 숨 쉬기가 힘들고 압사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드는지. 그리고 불현듯 그녀와의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 몸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 숨 막히게 짓누르던 무게감, 그리고 그녀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 떠나던 뒷모습이 홀가분해 보였던 건 저주받은 운명을 떠넘겼기 때문이리라. 아니, 일부러 떠넘기기 위해 가증스러울 만큼 말간 얼굴로 접근한 것이다.
"저주"에 대해 알아낸 바는 이렇다. 첫째, 나는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둘째, 그림자는 물리적으로 내게 작용한다. 그림자에 깔려 죽을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하게. 셋째,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의 영향이 약해진다.
이게 저주가 아니면 무엇일까? 태양 앞에 설 수도, 사람들과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가지고 있기에. 붐비는 곳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인식도 못 한채 살던 그림자를 이제는 인식하지 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까. 완전한 고립,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녀가 내게 저주를 떠넘겼듯 어쩌면 저주를 주고받는 게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아마도 그날 밤 우리가 했던 방식을 통해서. 다른 여인과 관계를 맺는 쪽이 빠르다는 걸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영영 저주를 떠안게 될지라도 그녀여야만 했다. 제 이익 앞에 거리낌 없는 그녀만큼 저주와 어울리는 대상은 없으니까.
#6
어쩌면 운명에 순응할 수도 있었으리라. 노비가 제 신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듯이, 나도 저주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더라면... 하지만 그 대신 나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장터로 향했다. 가고, 또 가고, 관성처럼, 습관처럼.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러지 않고는 견디질 못할 것 같아서.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이제는 흐릿했다. 내 시간은 그 날밤에 멈춰서 흐르지 않았다.
자주 그녀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정말 일부러 그런 거냐고,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없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모호해서 읽기 힘들었고, 꾹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나마 그녀 목소리 듣기가 왜 이리도 힘든지. 제발 몰랐다고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저주받은 운명이 너무 괴로워 어쩔 수 없었다고 해주기를... 무의미한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어리석게도 어느 날은 그녀를 용서했다가, 또 어느 날은 매몰차게 돌아서기를 수 천, 수 만 번을 반복했다. 무수한 번복 끝에 내린 결론은, 딱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것.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쯤은 안다. 이 몸으로는 그녀를 안을 수도, 태양 아래 나란히 걸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찾아 헤매는 영생과 죽음을 앞둔 한 번의 만남 중 택해야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리라.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서 그녀의 그림자에 압사당하는 건 꽤나 낭만적이기에. 공허와 허탈뿐인 무의미한 궤적을 잇는 지금의 삶보다 훨씬 더.
그날처럼 달이 무척이나 밝은 밤이었다. 그림자가 만든 선명한 대조가 무겁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희망을 품게 되는 그런 밤. 곧 그녀를 조우하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이 왜 이리 간절한지. 언제나처럼 희망은 곧 깨어지겠지만 술기운에 젖어서라도 더 붙잡고 싶은 걸까?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시야가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더니 까맣게 물들었다.
"일어나 보십시오."
어깨를 잡고 흔드는 손길에 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으음. 신음만 내고 일어나지 않자 손길에 힘이 가해졌다.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찌푸려 손길의 주인을 담으려 애썼지만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까지 어깨에 올린 손도 그대로, 마주 보고 있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선이 곱고 단정한 얼굴이 천천히 시야에 아로새겨졌다. 그녀를 소리 내 부르려다 감히 내가 그래도 될지 몰라 숨만 삼켰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몰랐다. 대체 나는 그 긴 시간 무엇을 쫓은 건가. 아기 새가 첫 숨을 토하듯 그녀를 부르고 싶었는데... 팽, 눈물이 고였다. 한데 얽히고 뭉쳐서 식별조차 불가능한 이 감정에 원망과 그리움은 조금도 없었다. 단 하룻밤이지만 강렬하고 소중해서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던 순수했던 마음뿐이었다.
"영업 끝났으니 돌아가주십시오."
짙게 깔린 목소리. 이질감이 들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그녀의 목소리와 확연히 다른 사내의 것이었다. 잠깐만, 사내...? 취기가 확 가셨다. 뺨을 몇 차례 내려쳤다. 초점을 잡으려 눈에 힘을 줬다. 단정하고 선이 고왔지만 틀림없는 사내였다. 화들짝 놀라 몸을 물리다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다리에 걸린 상이 몸 위로 엎어졌고, 내 어깨를 쥐고 있던 그도 덩달아 중심을 잃었다. 술냄새가 훅 끼쳤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맞닿은 그의 온기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젖은 저고리 너머 그의 몸선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가 상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한심한 작태로 엎어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홀린 듯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의문이 스쳤다. 그날 밤 그녀처럼 그의 얼굴은 달밤 호수처럼 고요해서 읽을 수가 없다. 원래라면 몸을 겹치기는커녕 지금처럼 가까이 있기조차 불가능했다. 이렇게 달이 해처럼 밝은 밤에는 더더욱. 머리에서 발끝까지 투시하듯 그를 찬찬히 훑었다.
"너는.. 그림자가 없구나."
물기를 머금은 그는 달빛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에게 준 자개 비녀처럼. 어쩌면 그는 그녀를 찾을 실마리일지 몰랐다. 아니면 저주를 나눠질 운명 공동체일지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그녀가 떠난 후 죽은 것과 같은 내 삶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