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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쵸의 와장창창 미국 서부 불나방 여행 2일 차

초면인 내향형 셋의 숨 막히는 동행

by 재쵸

<미국 여행 2일 차:게티센터/칙필레/할리우드 명예의 거리/그리피스 천문대/펍>



<헌팅 명소, 마리비앤비 식탁>

새벽 두 시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모두 퇴실하고 나만 남아 있었다. 씻을 때 이마가 화끈거려서 보니까 얼마 전 고데기를 하다가 덴 곳이었다. 캘리포니아 햇빛이 강해서인지 거의 아물었는데 다시 덧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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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내려왔을 때는 식탁에 조식만 준비되어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오늘 같이 동행하기로 한 사람(샌디에이고 자석)에게서 LA에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다는 연락이 왔다. 동행도 없고 계획도 없고 데이터도 없었다. LA는 치안이 좋지 않아 무조건 우버를 타고 다닐 계획이었기에 데이터가 꼭 필요했다. 심카드 어떡하지? 아, 귀찮다.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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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미국식 아침을 먹으며 '마, 이게 미국이다...'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거실로 내려왔다. 고급 새틴 잠옷을 입은 그는 캐나다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유튜버였다. 사회성 0에 수렴하는 나는 대뜸 헌팅을 시도했다.

"오늘 뭐해요?"

"언어교환 어플에서 알게 된 현지인 친구가 투어 시켜준대요."

"저도 가도 돼요?"

"그 친구 내향형이라 한 번 물어볼게요."

잠시 연락을 주고받던 캐나다 워홀러는 '한 명까지는 괜찮대요.'라고 했다. 계획 없었는데 잘 됐다 싶은 것도 잠시, 내향형 셋을 모아두면 얼마나 숨이 막힐지 걱정이 됐다. 심지어 셋 중 나만 영어를 못 했다. 내가 얼마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간인가에 대한 일화들이 마구 떠올랐지만 계획을 짜는 건 더 싫었다. 귀찮기 때문이다. 나는 얼레벌레 마리비앤비까지 데리러 온 현지인의 차를 타고 게티 센터로 향했다.


<숨 막히는 게티 센터>

현지인은 딱 봐도 낯을 많이 가리는 내향인 중 내향인으로 보였고, 나도 여느 집단에서나 부적응자 역할이었기에 피차 다르지 않았다. 내향인 중 외향인인 캐나다 워홀러만이 그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다. 너무 숨이 막혀서 차라리 누가 뒷목이라도 쳐서 기절시켜 주기를 바랐다.

주차를 하고 입구로 가자 직원이 예약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예약을 안 했다. 나는 예약증을 내미는 현지인과 캐나다 워홀러 옆에 긴장한 채 서서 '나는 없다'라고 근엄하게 말했다. 직원은 '노 프라브럼, 쌉가넝~' 하며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체계는 없고 융통성은 넘치는 미국인들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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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임에도 정거장은 견학온 초등학생들로 붐볐다. 트램은 굽이굽이 언덕길을 올랐고 창밖으로 푸릇푸릇한 녹음 위로 햇빛이 찬란했다. 와글대는 초등학생들 때문에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데 한 초등학생이 자리를 양보했다. 캐나다 워홀러와 나는 꼬마신사의 호기로움에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의 감사 인사에 꼬마신사는 여유롭게 답했다.

"It's my pleasure."

이제부터 신사의 나라는 미국입니다. 영국은 빠져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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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센터에서 유명한 건 정원인데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우리네 어머님들의 카톡 배경 사진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심미적으로 아름답지도 않고, 사진 스팟도 아닌 애매한 곳이었다. 박물관에만 가면 하품을 갈기는 나지만 오히려 전시가 더 흥미로웠다. 그런데 캐나다 워홀러는 사진만 찍고 동영상은 찍지 않았다.

"유튜브 안 해? 왜 안 찍어?"

"아, 맞다."

그 뒤로도 캐나다 워홀러는 본인이 유튜버임을 까먹었고, 내가 유튜브 얘기를 꺼낼 때마다 '아, 맞다.'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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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조금쯤 어색함이 사라졌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게티 센터 내에서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인터넷 없이 여행한다는 건 수족이 없는 것과 다름없음을 몸소 체감했기에 다급히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나는 심카드 안 사고 뭉개고도 남을 놈이기에 차라리 빨리 충전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루 반 인터넷 없이 살아보니 가성비고 뭐고 따질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한국 영업시간에만 상담원 연결이 가능했다. 돈도 있고 의지도 있는데 왜 충전을 못 하니. 심지어 트램을 타고 다시 내려가면서 보조 배터리도 안 가져왔음을 깨달았다. 밤새 충전도 해놨는데...


<제2의 파이브가이즈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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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눈빛으로 친절하게 고객을 응대하는 햄버거집 점원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댓글에는 여기 진짜 맛있고 직원들도 사람 착각하게끔 친절하다고 적혀있었다. 마침 현지인이 우리를 데려간 곳이 영상 속 버거집이었다.

영상과 달리 동결건조된 동태눈 직원이 무미건조하게 주문을 받았다. 이름을 알려주고 나서 수령하는 곳으로 갔다. 점원은 무슨 소스가 필요하냐고 묻기에 영어 못하는 애들의 습성인 'no'부터 외치기를 시전 했다. 받고 보니 세 명 중 두 명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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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둘기와 참새들과 옹기종기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뭔가 심심했다. 감자튀김용 케첩을 같이 줬으면서 소스는 왜 물어본 걸까? 하지만 아직 낯 가리는 중이었기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칙필레에는 약 10여 가지의 소스가 있다고 한다. 전부 다 달라고 해서 취향에 맞는 걸로 빵에 발라먹는 게 진리라고 했다. 남은 소스들은 감자튀김에 찍어먹고 말이다. 제2의 파이브 가이즈 사태였다.

4년 전 뉴욕 여행에서 파이브 가이즈에 갔었다. 점원은 어떤 토핑을 넣을 거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점원의 동공에 지진이 난 채 다시 물었다. '정말로? 정말 괜찮아?' 나는 대체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 진짜 괜찮다고~!' 호기롭게 답했다. 체념한 그는 내게 빵과 치즈와 고기만 들어간 버거를 주었다. 나는 파이브 가이즈도 서브웨이처럼 모든 토핑이 기본값이라고 생각했다. 빼거나 더할 게 있는지를 물어본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부 다 넣어달라고 해야지 파이브 가이즈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거였다. 너무 느끼해서 그야말로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지나가던 점원이 내게만 맛있냐고 물었고, 나는 원래 고지혈증 식단을 선호하는 사람인 척 웃어주었다. 소심한 '굿...'과 함께.

다행히 둘은 소스 없이도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시선은 비둘기를 쫓으며 둘의 대화를 들었다. 캐나다 워홀러는 현지인에게 연예인을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현지인은 샹치의 시무 리우를 봤다고 했고, 캐나다 워홀러는 시무 리우는 커녕 샹치가 뭔지도 몰랐다. 머쓱해하는 현지인에게 '나는 알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대는 것 같아서 참았다.

식사를 마쳤을 때 배터리는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보조배터리 있으니까 괜찮다고 완충을 안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9시가 돼도 시계가 방전된다면 무슨 소용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둘기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었다.


<마, 이게 남포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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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패키지여행이 그러하듯 나는 어디에 가는지도 모른 채 차를 타고 이동했다. 현지인은 우리를 남포동... 아니,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내려주었다. 씨앗 호떡과 물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을 것 같은 익숙한 풍경에 '여기는 LA다...' 세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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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있는 큰 기념품 상점인 라라랜드에 들렀다. 호주 워홀을 앞두고 짐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트로피는 못 참지. 세계 최고의 손주, 세계 최고의 할머니 같은 멋진 트로피들 중 지루한, 하지만 내게 걸맞은 걸 찾았다. '월드 베스트 아티스트' 월드까지 아니어도 좋았다. 더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족 회사 겸 좆소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곳은 필연적으로 성공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다 무너져가는 회사 하나 가졌다고 내 영혼의 주인 행세를 하는 사장들에게 신물이 났다.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트로피를 샀다. 식빵 조각처럼 늘어선 내 어느 시점에 바라는 내가 아닌 이미 되어있는 내가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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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겟몰에 올라오니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작게 보였다. 할리우드 사인 뒤쪽으로 등산을 해서 석양을 보는 게 멋지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등산을 할 수 있냐고 묻자 현지인은 지금 출발해도 석양을 보기에는 늦었다고 했다. 우리는 멀리 보이는 할리우드 사인과 사진을 찍었다. 현지인은 우리를 차에 싣고 다음 코스로 향했다.


<숨통이 트이기까지 걸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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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 투어 마지막 코스는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일몰 보기였다. 가는 동안 현지인의 충전 잭으로 충전을 해서 배터리 잔량은 11%에서 47%가 되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그리피스까지 가려면 꽤 걸어야 했는데 벌써 휴대폰이 터지지 않았다. 어차피 인터넷 못 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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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대까지 올라가면서 달리기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데 살면 여기서 맨날 조깅할 수 있겠지? 때마침 가볍게 운동복만 입은 사람이 내리막을 뛰어갔다. 언제 또 여길 오겠나 싶어 나도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갔다. 케즈를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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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대에 도착했을 때는 일몰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현지인은 천문대 안에 들어가 볼래? 하고 물었고, 캐나다 워홀러는 거절했다. 현지인은 '공짜야.' 하고 다시 말했고,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천문대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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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전망대에 올라가 일몰을 기다렸다. 현지인이 트로피를 보고 내게 예술가냐고 물은 걸 계기로 처음으로 둘이 제대로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뉴욕 여행을 갔다는 현지인에게 나는 마치 뉴욕 대변인인양 뉴욕 추억 팔이를 했다. 현지인에게 가성비 남미 여행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남미 왕복 비행기표를 30만 원이라는 파격가에 샀지만, 며칠 만에 집에 가고 싶어 편도 표를 검색하니 300만 원이었다는 눈물의 이야기)

"남미 누구랑 갔어?"

"구남친...^^"

"아...^^..."

"걔 잘못은 아니었어...^^"

"응...^^..."


<당신은 유튜버입니다>

나는 여행을 갈 때면 꼭 필름 카메라를 챙긴다. 사진 찍기가 취미인 현지인에게 필름 카메라를 한 번 찍어보라고 권했다. 마지막 롤이었는지 필름 감기는 소리가 났다. 자꾸만 본인이 유투버임을 잊는 캐나다 워홀러에게 필름 가는 걸 찍으라고 권했다. 필름 투입구를 열어서 기존 필름을 꺼낸 뒤 새 필름을 끼워 다시 투입구를 닫았다. 챠라라라라락-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잘 찍었어?"

"어, 영상 아니고 사진이었네..."

이 날 캐나다 워홀러의 유튜브 인트로도 찍어주었지만 그의 채널에 LA 여행 영상은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저는 심미안을 가진 미남 성애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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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몰부터 야경까지 천문대에 머물렀다. 캐나다 워홀러는 다급히 나를 부르며 슬쩍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기 언니 취향!"

그냥 털보였다.

"죽을래. 난 잘생긴 사람 좋아한다고."

"언니 취향 맞는데..."

캐나다 워홀러에게 애아부지 사진을 보여준 것이 화근이었다. 그 뒤로 길거리에 털보 아니면 주한미군(노화를 곁들인) 스타일만 있으면 나를 불러 세웠다. 저 사람 언니 취향 아니에요? 하며...

우리의 취향은 정 반대였다. 나는 남성성이 넘치는 단정한 얼굴을 좋아했고(지진희), 캐나다 워홀러의 이상형은 박재범이었다. 양 극단에 선 취향을 가졌기에 서로가 서로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리 잘 생겨도 날티나는 스타일은 싫었고 캐나다 워홀러에게 지진희는 아저씨에 불과했다.

마침 농구복을 입고 온 남자가 우리 근처에 왔다. 날티나고 까리한 것이 딱 봐도 캐나다 워홀러의 취향이었다. 캐나다 워홀러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어려 보이긴 했지만 동안인 성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을 걸어보라고 부추겼다. 내게 온갖 털보와 아저씨들을 갖다 붙일 때와 달리 캐나다 워홀러는 쑥스러워 그저 훔쳐만 볼 뿐이었다.

반나절에 걸쳐 친해진 우리는 올라갈 때와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천문대를 내려왔다. 셔틀버스 정거장에서 농구복 가이를 다시 발견했다.

"저기 니 남친이다. 빨리 잡아.."

"어떻게 그래요.."

"아니, 감옥 갈 기회 잡으라고.."

이야기를 듣던 현지인이 캐나다 워홀러에게 이상형이 뭐냐고 물었다. 캐나다 워홀러는 환하게 웃으며 "톨 앤 핸썸.^^"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다시 현지인의 차에 탔다. 현지인은 우리에게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선물로 줬다. 그새 거의 소진된 배터리를 충전하며 다음 목적지인 펍으로 향했다. 천문대를 벗어났는데도 휴대폰에는 서비스 불가지역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티모바일이 보일 때마다 가습이 갑갑했다.


<데이터 거지 신세를 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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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지 않는 현지인은 우리를 The belmont 펍 앞에 내려주고 투어를 종료했다. 칵테일과 맥주, 타코를 주문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추가 데이터를 구매했다! 그런데 여전히 휴대폰에는 서비스 불가지역 표시가 떠있었다. 업체가 알려주는 대로 설정도 바꾸고 휴대폰도 껐다 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남은 여행은 어떡하지? 불안이 몰려왔고 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심이 문제인가 싶어 한국 유심 끼웠다가 다시 미국 유심으로 바꿔 끼우고 별 짓을 다 했다. 알고 보니 무슨 설정이 꺼져 있어서 그런 거였다. 데이터 잔량이 10G로 표시됐을 때의 환희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원래 낯선 이에게 친한 척하지 않지만 너무 기뻐서 얼굴도 모르는 공항 유심센터 직원에게 주접도 떨었다.

티비에는 NBA 경기가 틀어져 있었다. 어제 만난 동행 중 공무원이 NBA 보러 간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도 아닌데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인지 종종 동행들 생각이 났다. 연락처를 교환한 것도 아니니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처음부터 남자 동행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아쉬웠다. 나한테 예쁘다고 했던(끝까지 우려먹기) 친구에게서도 디즈니랜드 폐장 시간까지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전날 오늘 시간이 맞으면 같이 놀기로 했기에 데이터와 배터리가 없는 와중에도 계속 소통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늦게라도 보자고 했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이 없음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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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은 영화와 노래를 틀고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 한창이었다. 캐나다 워홀러는 유튜브가 엄청나게 밀렸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야망을 갖고 먹히는 컨텐츠로 다시 도전하라고 부추겼다. 참고로 나는 날로 먹는 인생을 꿈꾸며 호기롭게 유튜브에 도전했다가 망한 전력이 있다.

캐나다에 사니 국제 연애는 어떠냐는 말에 캐나다 워홀러는 난색을 표했다. 대시를 하기보다는 간택받는 쪽이라면서. 나는 주변인에게 웃음을 준 근 3년간의 돌진 연애사를 풀었다. 나 같은 미친놈의 일화에도 못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캐나다 워홀러는 결국 데이팅 앱을 시도하기로 했다.

우버를 타고 돌아오는 길, 보름달이 무척이나 둥글었다. 숙소는 싹 물갈이가 되었다. 내가 묵던 방으로 캐나다 워홀러가 옮겨왔고, 뉴욕에서 인턴을 한 분이 새로 들어왔다. 한인 민박의 장점인 일과가 끝난 후 모여 수다 떨기를 가졌다. 드러누워 쉬는데 캐나다 워홀러는 어플에 털보만 나오면 나를 불렀다.

"털만 나면 내 남자냐.. 부르지 마라.."

나지막이 경고한 뒤 다시 드러누웠다. 캐나다 워홀러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만 2,300장인 데다 연락도 잔뜩 쌓여 있었다. 전 직장 동료들은 연락이 두절된 나를 두고 '얼마나 즐거운 밤을 보내기에 연락이 없냐'고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걱정 마요. 수녀예요.' 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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