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을 사랑한 소년
소년에게 사랑은 너무 쉬웠다. 눈 깜빡임, 고갯짓 한 번, 내뱉는 숨결만으로 저절로 주어지는 것. 그저 향유하면 되는 것. 만물이 소년을 사랑했기에 내리쬐는 태양도 소년이 인상을 찌푸리면 구름 뒤로 숨어들었고, 거센 돌풍도 소년에게는 산들바람이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구름 조각도 소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살랑이는 갈색 곱슬 머리칼, 지그시 감았다 뜰 때면 햇빛에 반짝이는 긴 속눈썹, 은은한 홍조가 어린 뺨 위로 눈꽃처럼 내려앉은 주근깨. 그 누가 소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소년에게는 무엇도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되려 바라지도 않았던 찬사나 호의를 멋대로 안겨놓고 실망하는 행태에 진저리만 날 뿐.
불빛 한 점 없는 온전한 어둠 속 유일한 빛은 멀리 떠있는 달 뿐이었다. 달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무작정 언덕을 올랐다. 어찌나 캄캄한지 지금 오르고 있는 언덕이 가파른지 완만한지도 알 수 없었다. 영원히 닿지 않을 것만 같은 달을 쫓기란 마치 허상을 쫓는 것 같았다. 가슴 뻐근한 무력감, 하지만 찰나 같으면서도 영원 같기도 한 시간은 소년을 언덕 꼭대기로 인도했다. 그곳에서 달은 소년은 기다리고 있었다.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영롱하게 빛나는 채.
매일 밤 언덕을 올랐다. 달은 햇빛을 반사하는 눈처럼 새하얗게 빛이 났고, 어느 날엔 노을을 삼킨 듯 은은하게 포근함을 뿜어냈다. 어떤 빛깔을 하고 있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달은 언제나 다정하게 소년을 맞아주었다는 것. 마치 그를 위로하기 위해 늘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듯이.
소년에게 언덕을 오르는 시간은 벅찬 고대로 가득했다. 우주 탐사를 간대도 두 손으로 생생하게 달을 만질 수도, 발로 지면을 느낄 수도 없으며, 들이쉬고 내뱉는 숨을 우주에 흩뿌릴 수 없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이 온전히 달을 향유하기란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이 언덕, 미네소타의 작은 시골 마을의 언덕에서만큼은 달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닿을 만큼 가까이'가 시적인 표현이 아닌 현실이었다. 달에서 숨을 쉬고, 발을 내딛고, 오감으로 느끼며 생동할 수 있었다. 달을 껴안고 스르르 잠에 들면, 그간 소년을 지독히도 따라다니던 공허함이나 염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소년을 가족, 친구, 그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 속에 있게 해주는 달은 소년에게 위로였다.
그리고 소년의 위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언덕을 올라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언덕 꼭대기에서 팔을 뻗어도 달은 별처럼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해도 마찬가지였다. 달에서 잠들었던 것, 달을 끌어안고 하루 일과를 속삭였던 것, 모두 꿈이었나. 소년은 수없이 달에 닿을 수 없음을 직면한 후에야 받아들였다. 언제나 한결같이 소년을 위로하던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 돌아갔음을.
2. 인간을 혐오한 달
왓 더 퍽! 인간이 되어 내뱉은 최초의 말.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었다. 그렇게 영원히 존재할 수도 있었는데! 원인 모를 저주로 인간이 됐고, 이제 더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끼니를 챙겨야 했고,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 필요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이 고되다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시작이 쥐꼬리라면 그 끝이 창대해질 일은 영원히 없으니. 그뿐이랴. 불시에 투척되는 외모 지적과 성희롱, 표정이라도 굳혔다가는 뒤따르는 사근사근 굴라는 압박. 인간들이 개미 생김새를 구분 못 하듯, 내게 인간들이 그랬다. 구분도 불가할뿐더러 개중 좀 이뻐봤자 그냥 개미인 것을. 다 똑같이 생긴 도토리들한테 평가받을 때면 내가 개미 군단에 합류했음을 실감했다.
게임에는 쉬운 길을 가게 해주는 '치트키'가 숨겨져 있다. 인생도 게임과 같아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치트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돈, 외모, 재능, 끈기, 하물며 중상모략 까지도.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건 무엇인가. 경상도의 가난한 집안의 예쁘지도 애살 맞지도 않은 장녀,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소기업에 십여 년째 갇혀있는 만년 대리. 관리자 모드로 최악의 조건을 설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게 부여된 '여자'라는 성에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은 어찌나 과도한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다. 나는 성별이란 개념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무생물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여자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니. 그것도 미네소타보다 작은 한국이란 나라, 남존여비의 고장 경상도에서.
내가 접했던 인간이라곤 밤마다 찾아와 관심도 없는 얘기를 속살대던 엿같은 꼬맹이뿐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걸. 멍청하고 유약하고 쓸모없는 존재. 그리고 인간이 된 지금,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 미칠 것 같았다. 다시 달이 되어야만 했다.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3. 미네소타 보이는 여전히 미네소타에
어쩌면 소년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을 수도 있었다. 소년이 가진 것에 만족하기만 했더라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년은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연연했고, 그마저도 완전히 잃어 다시는 꿈꿀 수 조차 없게 됐다. 찬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애정을 요구당하는 것도, 호의를 얻는 것도... 모든 게 너무 쉬워서 비참하리만큼 무료했다. 텅 빈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 왜 공허한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삶을 온전히 향유하라'만큼 와닿지 않는 이야기가 있을까. 가족, 친구, 사랑, 성취... 무엇도 소년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소년에게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장 귀여웠던 치어리더팀의 여자애와 데이트했을 때, 마음이 산들산들한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특별함이 평범함으로 전락했을 때의 허탈함은 상실보다 공허가 나음을 알려주었다. 정말 가고 싶었던 미식축구 경기를 직관했을 때보다 어렵게 표를 구했던 순간이 더 설레는 것처럼, 어쩌면 모든 욕망은 미결상태일 때 더 아름다운 게 아닐까. 소유하는 순간부터 퇴색이 시작되니까.
소년의 마지막 욕망은 세계사 수업 시간에 불현듯 찾아왔다. 이집트 벽화 속 여인을 본 순간, 소년의 공허뿐인 세계가 전율했다. 마치 무방비 상태에서 뱀에 물린 듯,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강렬한 충격. 살 같을 뚫고 들어온 독니처럼 벽화 속 여인이 콱- 맘 속에 박혔다. 소년은 결심했다. 흐지부지되는 마음이 아닌 몸에 새겨 넣자고.
홀연히 자신을 떠난 달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소년은 어둠보다는 빛을, 달보다는 태양을 선호했다. 어쩌면 이 끌림은 달을 향한 원망에서 기인한 건지도 몰랐다. 태양신의 무덤에서 영원히 태양을 그리는 여인만큼 달과 대척점에 선 존재는 없을 테니. 출처는 알 수 없어도 소년은 이 강렬한 끌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방학 내내 슈퍼마켓에서 일을 해도 고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가 소년의 인생에서 가장 기대에 찼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마침내 소년은 동네에 있는 유일한 타투샵에서 타투를 새겼다. 제대로 전사도 뜨지 않고 새긴 조악한 타투는 얼마지 않아 선이 번지고 색은 흐려졌다. 결국 어디에도 영원은 없었다. 어떤 욕망이건 찰나에 불과하고 감흥은 빠르게 휘발됨을 소년은 받아들였다. 그 무수한 반복이 인생이라는 것도.
소년은 제 인생보다 영화 속 세상을 들여보는 걸 좋아했다. 2시간 안에 삶의 핵심이 들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삶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삶은 왜 영화가 아닐까? 시간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길고도 긴 생을 얼마나 더 질질 끌고 가야 하는 거지? 불현듯 염세성과 허무주의 아래 깔려있던 오랜 꿈이 떠올랐다.
미네소타에서 나고 자란 소년에게 바다란 미지였다. 하늘에 파도가 칠 때면 소년은 바다를 꿈꿨었다. 아스페리타스 구름은 파도를 꼭 닮았지만, 언젠가는 진짜 바다를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욕망의 퇴색에 세상 밖에 나가고 싶다는 꿈은 시들해졌다. 어차피 타투처럼, 마음처럼 다 변해버릴 텐데. 차라리 진짜 파도를 상상하면서 '가능성'으로 남겨두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던 바다가 갑자기 너무도 간절했다.
소년은 스스로 영화 속에 걸어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지구본을 돌려 멈췄을 때 두 번째로 작은 나라에 가자. 소년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지구본을 돌렸다. 빠르게 돌아가는 구가 이토록 가슴 뛴 적 있었던가. 어찌나 세게 돌렸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창 밖 하늘에는 파도가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 치는 파도가 아니라 진짜 파도를 보러 갈 때였다. 마침내 지구본이 멈췄다. 소년의 목적지는 정해졌다.
4. 언제나 계략을 꾸미는 쪽은 태양이 아니라 달이었지
야수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야 하고,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렇다면 달이 졸지에 경상도의 남동생 줄줄이 딸린 집 장녀가 된다면? 야수는 마녀에게 무례하게 굴어 저주를 받았고, 인어공주는 사랑에 눈멀어 불공정 계약을 했다. 인과가 명확한 그들과 달리 나는 졸지에 이유도 없이 이렇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무례하게 군 적도, 멍청하게 남을 덥석 믿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불현듯 매일 밤 찾아와 귀찮게 했던 꼬맹이가 떠올랐다. 내가 접한 유일한 인간이자 평화로운 내 일상에 불현듯 나타난 변수. 하지만 하찮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독을 품은 이무기처럼 상황을 복기하고 다각도에서 추리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커녕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나는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겠지. 언젠가는 다시 달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로. 하나 다행인 건 세상에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 마약 같은 것들. 기왕이면 단명에 도움을 주는 마약이 낫겠지만 노예처럼 뼈 빠지게 일해서 박봉을 버는 처지에는 술 만한 게 없었다. 소주 한 병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는 본연의 상태, 죽음과 같은 잠. 그것만이 엿같은 현실을 잊게 해 주니까.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과 대조되는 백사장, 멀리 알록달록 빛나는 익숙한 다리. 서늘한 바람에 부드러운 갈색 곱슬 머리칼이 흩날렸다. 오우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갈매기들이 한 두 마리씩 나타났다. 박력 있게 새우깡 봉지를 뜯어 과자를 꺼내 들었다. 피뢰침에 벼락이 꽂히듯 허공에서 새우깡이 번쩍 빛났다. 몰려드는 새 떼에 빅뱅이 일어나듯 일순간 세계가 요동쳤다.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거다!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광안리에서 갈매기한테 밥 주기. 이제 꿈을 똑같이 재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들지? 마치 뭔가를 놓친 것처럼. 잡힐 듯 말 듯 가물가물한 기억을 애써 되짚었다. 섬광처럼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칼이 떠올랐다. 뒤이어 퍼즐을 맞추듯 흐릿했던 장면들이 되살아났다. 이마에서 우뚝한 콧날로 떨어지는 유려한 선, 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푸른 눈, 적당히 각진 턱과 길게 패인 뺨에서는 남자다운 분위기가 풍겼지만 도톰한 입술과 장난스럽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소년미가 남아 있었다. 너무 병풍 같아서 인지조차 못했던 얼굴 위로 소년이 겹쳐졌다.
"왓 더 퍽!"
이게 말이 돼? 그 귀찮은 꼬맹이가 저주를 풀기 위한 재료 중 하나라는 게? 찰나의 기쁨은 긴 좌절을 극대화하기 위한 복선이었나. 미네소타 사는 놈을 부산까지 어떻게 데려오라고. 아니, 애초에 그놈을 찾을 수는 있는 거야?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왕자와 결혼하기, 야수 꼴을 하고 절세미녀와 진실된 사랑을 하기보다 더 어렵잖아!
미네소타행 항공권 금액과 환승 횟수에 질겁하며 모니터를 꺼버렸다. 김해공항에는 비행 편이 없어서 상경이 필수인 데다 직항은 내 월급과 맞먹었었다. 경유는 최소 3번을 해야 하고 이틀이 넘게 걸리지만 싸지도 않았다. 나는 연월차 대신 여름휴가 5일을 주는 5인 미만 소기업에 다니고 있다. 가는 데 이틀, 오는 데 이틀, 소년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답은 퇴사뿐이었다. 하지만 계시인지 개꿈인지 모를 꿈만 믿고 모든 걸 내던질 수는 없었다. 이제 더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달이 아닌 매달 들어오는 푼돈이 간절한 인간이니까.
인터넷의 발달이란 어찌나 용이한가. 약간의 키워드 조합으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니. 성장한 모습을 이미 봤으니 소년을 찾기만 한다면 알아볼 자신도 있었다. 문제는 이름을 모른다는 것. 환장하겠네. 신경질적으로 미네소타 귀찮은 꼬맹이, 엿같은 꼬맹이 따위를 쳐봤지만 역시나 뜰 리가 없지.
아는 거라곤 출신과 얼굴뿐인 소년을 찾는 답도 없는 여정이 이어졌다. 어디 갈 필요 없이 앉은자리에서 특정 지역 남자들의 얼굴만 모아 볼 방법만 있다면... 문득 소년이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나이대 남자는 무조건 여자에 미쳐있을 테니 필연적으로 데이팅앱을 쓰리라. 이미 결혼을 했거나 애인이 있어서 앱을 안 쓰는 경우, 게이인 경우는 잊기로 했다. 돈과 시간의 제약이 있는 현 상황에서 최소의 정보로 소년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결제 한 번에 앱으로 세계여행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우선 일주일을 결제했다. 위치를 미네소타로 바꾸고 나잇대와 키 등 세부 조건을 설정했다. 하지만 한국보다 더 큰 미네소타에서 소년 찾기란 유료회원 필터기능과 함께여도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아무런 성과 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다. 어플 상 내 위치는 미네소타에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위치를 바꾸려면 다시 결제를 해야 했다. 결제 기간에 따라 할인율이 다르게 적용되는데, 당연히 평생 유료 회원권이 가장 저렴했다. 20만 원, 항공료의 10분의 1 밖에 되지 않았지만 데이팅앱에 쓰기에는 너무도 아까웠다. 그래, 딱 일주일만 더 찾아보자.
그렇게 일주일, 일주일, 일주일... 이런 식으로 일주일씩 평생회원 금액을 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생회원을 끊었다가는 평생을 어플에서 스와이프만 할 것 같았다. 달이 되겠다고 되뇌며 데이팅 앱을 뒤지는 노인. 으! 강하게 고개를 내저어도 비참한 말로는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딱 6개월, 6개월어치만 결제해서 그 안에 찾아보자.
다시 미네소타로 여행을 왔다. 스와이프를 하다 하다 못해 미네소타 남자는 다 넘겨버렸는지 다른 주 남자들까지 뜨기 시작했다. 여행이라도 갔나 싶어서 어느 날은 뉴욕에 갔다가, 어느 날은 LA로, 어느 날은 베가스로 가서 스와이프를 했다. 6개월이 가까워져 오는데 망할 놈의 소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배제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여태까지 개꿈을 쫓아왔다거나 애당초 내가 달인 적이 없었거나. 끔찍한 현실을 잊기 위해 스스로가 달이라는 망상을 하다 철석같이 믿게 된 거라면... 여태까지 부정해 온 삶은 내 몫이었고, 앞으로 남은 생을 감당하려 애써야 하겠지. 원망할 대상도 없이 비참한 생을 온전히 받아들인 채.
5. 사람이 싫은 달, 달을 좋아하는 사람
부산에서의 첫 해는 더할 나위 없었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게 이거였나 싶을 만큼. 하늘 속 파도가 아닌 진짜 바다를 봤을 때, 드디어 상실의 종결이 다가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낯섦은 익숙함이 되고 감흥이 줄어든 자리에는 허무가 차곡차곡 쌓였다. 결국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여기나 미네소타나. 대륙이 바뀐다고 무엇에도 설레지 못했던 그 소년이 어딜 가나.
시간 죽이기에는 데이팅앱만 한 게 없었다. 관성적으로 스와이프나 하며 행위 자체에 몰두하고 싶었다. 첫 사진에서 0.3초 만에 판가름 나는 잔인한 세상, 거기서 파생된 만남은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게 해 주겠지. 여운 없는 일회성 만남이 축적될수록 삶은 더 재미없어질 테지만, 미래의 몫을 끌고 와 허무를 메우지 않는다면 어찌 미래를 맞이하겠는가. 결국 조삼모사에 불과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 따위보다는 현재가 중요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스와이프를 이어가던 중 손가락이 멈칫했다. 까만 밤하늘에 눈부시게 빛나는 달. 그 한 장의 사진에 심장이 쿵 내려앉은 건 왜일까. 제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아무 사진이나 걸어 놓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닌데. 이상한 건 사진 속 인물이 본인이 맞다는 인증 표시가 붙어 있었다. 사용자 이름도 '달'이었다. 장난처럼 만든 프로필인 걸 알면서도 홀린 듯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소년이여 내게 오라.'
미친놈인가? 얼른 치워버려야지. 분명 왼쪽으로 화면을 넘겼는데 달 사진 위로 경쾌하게 '매치!' 글자가 떠올랐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미동도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실수로 매치가 되고서 홀린 듯 메시지를 보낸 게 화근이었다. 자칭 '달'로부터 아직도 답이 오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심지어 성별도 모르는 사람의 답장을 왜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몰라도, 온 신경이 휴대폰으로, 아니 그 너머의 존재로 쏠려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아니면 전송 오류가 났나?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고, 문제가 없음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이 없음에 초조해졌다.
한 시간이 경과했다. 신경 끄고 있으면 언젠가 답이 올 텐데 왜 그게 안 되는 거지? 만약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데 기다리는 입장이었던 적이 없어서인지 시작도 못 한 채 끝날 수도 있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체 뭘 시작하고 뭘 끝낸다는 거야. 심심풀이로 시작한 데이팅앱에 연연하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웠다. 차라리 하나 더 보내볼까? 너무 구질구질해 보이려나? 만난 적도 없는데 뭐 어때. 수천번을 고민한 끝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서야 겨우 문장을 완성했지만 전송 버튼이란 벽 앞에 다시 막히고 말았다. 그때 화면에 '입력 중' 표시가 떠올랐다. 이미 여러 차례 내려앉은 심장이 더 떨어질 곳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달에게 답장이 왔을 때 아님을 깨달았다.
'만날래?'
입을 틀어막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의 신경이 찌릿하게 튀어 올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진에서 아름다워도 현실에서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힘들다는 걸. 최고의 순간에 가장 자연스럽고 그럴싸하게 순간 포착된 '나'는 현실에서 찰나에 불과하니까. 하물며 나는 내가 그토록 기다린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모른다. 믿기 어려우리만큼 좋을 확률보다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별로일 확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네가 누구인지, 달 사진으로 어떻게 얼굴 인증 표식을 받은 건지, 정말 네가 달인 지.
'싫어?'
평소라면 눈도 깜짝 안 할 말에 스스로가 무슨 답을 하는지도 모른 채 타자를 쳤다. 자꾸만 오타가 나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데 속이 탔다. 빨리 보내야 하는데... 그때 달로부터 다시 회신이 왔다.
'9시, 광안리에서 봐.'
그 말을 끝으로 대화방은 멈췄다. 방금 전까지 쓰던 답장 옆에서 커서 깜빡임이 쌓여갔다. 9시까지는 1시간 도 채 남지 않았다. 반발심이 밀려왔다. 당연히 내가 나갈 거라는 확신에 반증하고 싶었다. 하지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만지고 향수까지 뿌리는 일련의 과정은 그 확신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대체 왜 이리 들떴는지는 모르겠지만 썩 나쁘지 않다는 것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휘둘려 사건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이 기분은, 되려 꽤나... 좋았다.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까. 두려움? 김장? 설렘?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감정은 달을 조우했을 때 어디로 가게 될까. 늘 그래왔듯 이 또한 시시한 만남이 될 확률이 컸기에 차라리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얼른 달을 보고 싶어서 조급했다. 괜스레 발끝으로 땅을 차는데 발등 위로 은은한 빛이 내려앉았다. 홀린 듯 고개를 들자 달이 있었다. 아니, 얼굴이 달덩어리 같은... 사람이 있었다. 얼굴이 너무 동그래서 순간적으로 달이 겹쳐 보였나 보다.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실망스러울 거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그렇다고 믿기 힘들 만큼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확실한 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눈을 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름답다거나 첫눈에 반해서가 아니라 처음 언덕에서 달을 발견했을 때,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매운 새우깡을 품에 안은 달 같은 사람에게.
같이 광안리 해변을 걸었다. 매운 새우깡 봉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날 때마다 자꾸만 시선이 갔다.
"새우깡은 왜...?"
'갈매기 밥 주려고.'
분명 달은 입으로 말했는데 그의 말은 귀로 듣는다기보단 파동이 전해지듯 심장에 꽂혔다. 어릴 적 언덕에서 달을 껴안고 잠들었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잊고 지냈던 감각이 송두리째 되살아나 나를 그 순간으로 데려갔다. 마치 온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댔다. 두려우리만큼 강렬해서 감당하지도 못할 것을 바라왔나 싶을 정도로.
'갈매기가 없네.'
어디에나 항상 널려있던 갈매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달은 어찌나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인 그가 이대로 돌아가버릴까 덜컥 겁이 났다.
"백사장 말고, 저쪽 방파제 있는 곳에는 있을 거야."
'반대쪽이잖아.'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짜증이 투명했다. 일반적으로 데이트 상대에게 보여주지 않는 표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구나. 그럼에도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빨리 갈매기를 찾아야겠다는 조급함 뿐이었다. 왔던 만큼 걷고 나서야 방파제에 도착했다. 다행히 멀리 갈매기 두어 마리가 보였다. 새우깡을 뜯으려는 그의 움직임은 구조대를 발견한 조난자처럼 다급했다. 달에게서 새우깡을 앗아 봉지를 뜯었다. 미처 건넬 새도 없이 달이 봉지를 낚아챘다. 떨리는 손으로 새우깡을 꺼내 번쩍 팔을 치켜올렸다.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비장함에 나까지 덩달아 긴장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그 어떤 갈매기도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 달은 팔을 내렸다가 다시 힘차게 들어 올렸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복 끝에 결국 허탈하게 팔을 떨궜다.
'씨벌.'
달의 축 처진 어깨를 보는 건 괴로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이 살아있음을 일깨웠다. 방금 한 행위가 뭔지, 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던 텅 빈 시간을 그가 '삶'으로 바꿔주었으니까. 달의 커다란 얼굴에 비해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달은 펄쩍 뛰어오르는 고양이처럼 흠칫했다. 끔찍함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 위로 영화 속 장면이 전환되듯 달이 겹쳐졌다. 헛걸 본 게 아니었다. 진짜 달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달. 눈 시릴 만큼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소년의 달.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와 매운 새우깡이 그가 달임을 입증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덕을 오르고 올라도 찾을 수 없던 달이, 그를 찾아왔다. 소년은 달을 잊었지만 달은 소년을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달의 소개 문구가 이해가 갔다.
"소년이여 이리오라...."
어찌나 달콤한지 몇 번이고 되뇌고 싶은 말. 주체되지 않는 가슴 뻐근함에 못 이겨 달을 바라봤다. 얼굴이 없는데도 표정이 보였고, 목소리가 없어도 마음이 들렸다.
'가라, 그냥.'
하지만 소년은 달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 권태와 허무 속에 지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달만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그 포근함과 충만함은 잊을 수가 없었기에. 소년에게는 영원히 갇혀있고 싶은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