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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r 20. 2023

누구도 구제할 수 없는 여자

  여자는 시궁창 같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실은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지적과 외모 품평을 당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외모가 되었지만, 남이 잘 되면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뒤틀린 어른으로 자랐지만, 그렇기에 성인이 되자마자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남들을 내리 깔아봤지만, 얼마지 않아 고모에게 '수박에 줄 그었네'라는 말을 듣고 무너져 내렸지만... 그 순간들이 여자를 시궁창으로 인도한 셈이긴 했지만 삶은 충분히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요행만을 꿈꿨다. 현실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기에 여자의 머릿속은 언제나 바빴다. 여자가 실은 수년 전 잃어버린 부잣집 막내딸이라거나 여자의 가치를 알아본 죽음을 앞둔 노인이 후견인이 되어준다거나... 아주 작은 계기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시간만 흘렀다. 여자는 산다기보다는 무의미하게 숨만 쉬는 지금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제 삶을 구제하려 한 적 없기에.


  여자는 여름이 싫었다. 지독하게 더위를 많이 타는 데다 극지성피부가 기름을 뿜어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대부분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끈적한 몸에 들러붙는 얇은 여름 이불을 풀럭대며 깨있는 내내 휴대폰만 붙들고 있었다. 뽀송하게 웃는 신인 남배우의 사진을 보면 괜히 방이 더 습하게 느껴졌다. 달달대는 고물 선풍기가 괜스레 얄미워 후려쳤지만 손만 아플 뿐이었다. 에어컨 빵빵하게 튼 곳에서 알바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생각에 그쳤다. 방구석에서 하루 종일 남의 인생이나 들여다보는 건 거지 같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몸속 구석구석 녹은 캐러멜처럼 무기력이 찌덕하게 달라붙어 손가락이나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뇌까지 녹일 것 같은 더위에 진짜 뇌가 녹아버린 건지도 몰랐다.

  여자가 그렇다고 겨울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허리를 말고 목은 움츠린 채 걸어도 찬 바람이 빈 틈을 파고들었고, 얇은 신발 밑창에서는 냉기가 그대로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 더위와 추위를 둘 다 타면 어떻게 살란 걸까? 그래서 겨울이면 여자는 되도록 외출을 하지 않았다. 김밥처럼 이불을 싸매 자신만의 요새를 만들었다. 가끔 구직을 알아보기도 했다. 여긴 멀어서, 저긴 시급이 낮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거르고 거른 끝에 지원했지만 거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자를 걸렀기 때문이다.

  여자는 늘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심 자신의 삶이 이 모양 이 꼴을 벗어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좆같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삶을 말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망해가는 동네 영화관에서 면접 제의가 왔을 때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 어쩌면 그토록 바랐던 '그 순간'이 온 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생들은 대부분 여자의 또래였다. 다들 친해 보여서 낄 틈이 없어 보여 여자는 노력보다는 고립을 택했다. 하지만 자꾸만 그들에게 눈길이 향했다. 퇴근 후에는 동료들의 SNS를 찾아봤다. 연예 기사를 보듯이 그들의 일상을 소비했다.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아르바이트생들마저 친목에 끼었음을 알았을 때, 여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인정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나보다 늦게 들어온 주제에? 모든 게 꼴도 보기 싫어져 계정을 탈퇴하려다가 뒤로 가기를 눌렀다. 빈 프로필에 예전에 데이팅 어플에서 썼던 사진을 걸었다. 다시 동료들의 SNS를 타고 들어갔다. 아르바이트생들 중 가장 예쁜 애, 웃겨서 모두와 친한 남자애, 귀여움 받는 역할의 여자애, 키 크고 멀끔해서 종종 손님들에게 대시를 받는 오빠... 막상 행동을 하려니 손가락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그 오빠의 계정이 책이었다면 여자 때문에 너덜너덜 해졌으리라. 여자는 용기를 얻기 위해 오빠의 글 중 '주사위에서 1이 나올 확률'을 눌렀다.

  '인생을 단기적으로 보면 불공평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공평하다고 한다. 주사위에서 1이 나올 확률은 1/6일 것 같지만 6번을 굴렸을 때는 1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사위를 많이 던질수록 확률은 6분의 1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600번 굴리면 100번, 6000번을 굴리면 1000번. 마찬가지로 인생도 지금 순간만 보면 불공평하다 느낄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섞여 있기에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힘든 일이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꼭 필요한 성숙의 과정일 수도 있다. 비록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프기만 했던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에 내가 어떤 자세를 취했냐에 따라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다른 사람이 쓴 글이었다면 개똥철학을 길게도 써놨다며 비웃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빠가 쓴 글이니까. 댓글을 달아볼까, 좋아요라도 눌러볼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숨을 깊게 뽑아내는데 잘 생기지도, 인기가 많지도 않은 남자 동료로부터 팔로우 신청이 들어왔다. 여자가 수락을 누르자 남자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왔다.

  밤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오빠였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오빠와는 잘 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데다 성격도 좋은 오빠를 만나려면 아르바이트생 중에 가장 예쁜 애여야 했다. 아니면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애 정도라도. 뭐, 걔는 키가 작아서 오빠 옆에 서면 고목나무 매미처럼 꼴이 우습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르바이트생 중에 2등이니까. 여자는 가장 예쁜 애, 귀여운 애 다음으로 자신이 오빠 옆에 선 모습을 그렸다. 그때 현실을 일깨우듯 메시지가 왔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왜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자는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았지만 남자는 그보다 못했으니까, 제 주제에 이 정도 여자를 어떻게 만나겠는가? 몸은 해골처럼 앙상하게 골은 데다 어깨는 여자보다 좁았고, 머리는 풍선처럼 커다랬다. 뼈가 불툭 드러난 코는 높지도 않으면서 크기만 했다. 솔직히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만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건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시때때로 연락을 주고받고, 아르바이트하다가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을 얘기하면 무조건적인 편이 되어주고, 미지의 세계였던 이성의 몸을 접하는 것. 여자는 처음으로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던 둘은 주로 영화관에서 데이트를 했다. 재직자 카드만 보여주면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루한 유럽 독립 영화를 보며 첫 키스를 했다. 관객이 없는 예술 영화들 덕에 그들은 빠르게 진도를 밟았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뭐든 가능했지만 여자는 여기서 첫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하자'고 말한 뒤 축축한 손을 빼냈고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자는 반사적으로 우러러봤다. 희뿌연 빛을 덮어쓴 여자는 마치 남자를 구원하러 온 여신 같았으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발뒤꿈치의 쓰라림을 참으며 여자가 멀어졌고 남자는 개처럼 구두굽 소리를 쫓았다.

  생각보다 섹스는 별 거 없었다. 배경이 후져서인지, 상대가 별로여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건지 몰라 계속해서 시도했다. 너무 좋다고 스스로를 세뇌해보기도 하고, 여기가 모텔이 아닌 최고급 호텔이라 상상도 했다. 그리고 여자의 위에 있는 게 남자가 아닌 오빠라고 눈을 감고 그리기도 했다. 그래도 통 좋지는 않았지만. 퇴실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로였어?" 남자의 삐쭉대는 입술이 옹졸해서 흘러나온 말까지도 우스워보였다. 여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었다. 오빠와 대화를 한 건. 팝콘 통 세척 어떻게 하냐는 질문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질 줄 몰랐기에 여자는 무척이나 기뻤다. 여자는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오빠의 옆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몰랐다. 남자가 "애기야."라고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남자는 한 번도 여자를 '애기'라 부른 적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색한 연극투로 암묵적 비밀이던 둘의 관계를 까발린 것이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둘은 영화관 공식 커플이 됐다. 둘이 사귀어? 잘 어울리네. 나는 둘이 그런 줄 진작 알았다니까? 친근한 인사말에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전체 회식 할 건데 데이트 없으면 같이 와."

  오빠가 말했다. 여자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남자가 여자를 품에 끌어당겼다. 뿌듯한 미소와 함께 데이트가 있다고 답했다.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여자는 마치 환청을 듣는 것 같았다. 어느새 무리들은 멀어졌고 여자는 신호등 앞에 남자와 덩그러니 남겨졌다.

  "갈까?"

  씩 웃는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늦어서 갈 데도 없잖아. 그냥 회식 같이 가지."

  "왜 갈 데가 없어? 우리 둘만의 아지트 있잖아."

  남자가 여자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구역감이 치밀었다. 여자는 남자를 밀쳤다.

  "하.. 씨발. 좆구린 모텔이 너는 아지트야? 진짜 좆같네."

  여자는 남자 앞에서 욕을 한 적이 없지만 지금 욕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싸구려 모텔을 아지트라고 부르는 남자랑 사귀는 것도, 그딴 놈 때문에 회식에 갈 기회를 놓친 것도.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남자에게는 청춘을 5210원에 맡길 수 없다고 둘러댔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동료들이 여자를 남자와 당연하다는 듯 세트로 묶는 것도, 여자가 오빠와 얘기할 기미만 보이면 남자가 미어캣처럼 끼어드는 것까지는 참을만했다. 하지만 오빠가 여자친구가 생긴 건 참을 수 없었다. 심지어 여자가 인정했던 가장 예쁜 애나 귀여운 애가 아닌 뜬금없는 여자여서 더더욱. 얼굴도 평범하고 몸매도 그저 그렇고, 매력 없는 성격이던데 오빠와 사귀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고작 저 정도 여자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여자의 일상은 남자에게 맞춰졌다. 남자를 만날 수 없는 시간에는 누워서 휴대폰을 붙잡고 보냈다. 수중에는 돈이 없고, 시간은 넘쳤지만 달리 할 일은 없었으니까. 연예 기사를 다 보고 나면 SNS 염탐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생들끼리는 여전히 친해 보였으며 오빠는 평범한 여자애와 여전히 만나고 있었다. 번번이 기분이 잡쳤지만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지 않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자와 데이트를 할 때도 주로 영화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여자는 영화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들이 어떤지, 기존 직원들은 어떻게 지내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시도한 적도 많지만 둘은 공통 관심사가 없었고 대화가 잘 통하지도 않았다. 남자의 입은 여자에게 일종의 SNS인 셈이었다. 이런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적어도 남자와 있을 때면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필요했다. 눈에 차지 않았지만 이런 남자일지라도, 고작 이런 연애일지라도. 남자에게만큼은 여자는 여신이었고 역할에 몰두하다 보면 적어도 자신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남자가 잠꼬대로 아르바이트생 중 가장 예쁜 애의 이름을 부른 이후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졌지만.

  여자는 이미 수 없이 염탐했던 예쁜 애를 찾아보고, 찾아보고, 찾아보고, 증오하고, 비웃었다가, 마음속에서 그 존재가 너무 커져서 괴로워하고, 또다시 증오했다. 절대 바람피울 수 없다는 사실은 여자도 알았다. 남자는 감히 예쁜 애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있다한들 예쁜 애가 받아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에'는 자꾸만 이성을 침범하고 불안과 망상을 만들었다. 여자는 확신이 필요했고, 남자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서를 뽑아냈다. 하지만 확신의 약효는 짧아 남자는 계속해서 확인시켜줘야 했으며, 불쑥 디미는 추궁에 납득이 갈만한 답변도 해야 했다.

  여자는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잠들면 휴대폰을 뒤졌다. 봐서 좋을 게 없음을 알면서도 보는 순간은 스릴이 넘쳐서 그 재미를 잊지 못했다. 검색 기록부터 메시지까지 차례로 훑어갔다. 여자가 손에 쥔 게 판도라의 상자라 할지라도 잘만 닫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고이 닫고 다시는 열지 않으리라. 하지만 예쁜 애에게서 온 메시지를 발견했을 때, 여자는 읽지 않은 대화방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깼다.

  '응, 너도 수고했어!'

  그게 다였다. 여자는 미칠 지경이었다. 유추가 되지 않아서 이전에 있었을 무궁한 가능성이 사방으로 확장되었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꺼벙한 얼굴, 자다 깨 한층 커진 코, 누가 반쯤 접은 듯 왜소한 어깨가 우스웠다. 하지만 진짜 우스운 건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어서 여자는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상황 파악이 된 남자기 진절머리 난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시큼한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머릿속에서는 고작 이런 남자,라는 말이 왱왱 맴돌았다.

  "그만하자."

  "뭘 그만해. 그건 내가 할 말이지."

  "그래, 잘 됐네."

  남자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옷 입고 얘기하려는 건가? 아니면 괜히 센척하는 건까?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여신처럼 숭배했기에 이런 명백한 행동도 주관적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낚아챈 뒤 모텔방을 떠났다. 여자는 헤어질 생각이 없었지만 헤어지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매일 남자의 메신저 프로필을 들여다보다가 토시 하나라도 바뀌면 의미부여를 했다. 주변 사람들, 가족들 SNS까지 모두 훑었다. 새 소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열심히 좀먹어갔다. 사귈 때는 탐탁지 않았는데 헤어진 지금은 발굴되지 않은 원석을 놓친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도 신발을 신다가도 양치를 하다가도 왈칵 눈물이 터졌다.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서 여자는 타로점을 봤다. 재회를 할 수 있을지,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 좋은 결과가 나오면 기분이 나아졌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또 다른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것들을 찾아 헤매었다. 결과가 나쁘면 좋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타로를 봤다.

  재회에 관한 글이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재회를 했다는 후기로 시작해서 시크릿, 양자역학, 자기 암시와 확언기법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모든 글들이 정신승리의 소재가 되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하지만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이 남자의 생각으로 잠식되어서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듯 멍했다. 때때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이 괴로운데 멀쩡히 살아 있었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호르몬 장난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여자는 헤엄쳐 뭍으로 가거나 물에서 숨 쉬는 법을 익혀야 했다.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건 오직 물고기뿐이니까. 하지만 여자는 영원히 이곳에 갇혀 영원히 남자를 되뇔 것 같았다.

  남자로부터 연락이 온 건 새벽이었다. 수많은 재회 글들이 했던 조언은 사뿐히 밀어냈다. 예외라는 단어가 생긴 이유가 있다고, 우리가 그 근거가 되리라고 밑도 끝도 없는 희망에 찼다. 버스도 끊긴 새벽이지만 여자는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주홍빛 조명 아래 선 남자는 발굴을 기다리는 원석처럼 빛났다. 여자는 한달음에 남자에게 달려갔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매일 추억 속에서 미화되던 모습과 달랐다. 옹졸하게 몇 가닥 난 수염과 긴장했는지 삐쭉이는 개불 같은 입술, 조명 때문에 음영이 사라져 더 커 보이는 코까지. 분명 가슴이 터질 듯 벅찼는데 어느새 차분해졌다. 여자가 묘하게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여자를 품에 끌어안았고, 익숙한 냄새가 여자의 코에 훅 끼쳐 들어왔다. 포근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연상됐다. 심드렁했던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뛰기 시작했다. 아, 이게 남자의 품이었지. 비록 넓고 탄탄하지는 않지만, 남자는 여자를 여신으로 추대해 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휴대폰이나 하는 삶을 내던진 쓰레기가 아니라 키 큰 남자의 여자친구로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여자는 그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쯤은 알고 있었다. 제 주사위를 버리고 남자의 손에 쥔 주사위나 쳐다보는 셈이란 것도. 남자를 뿌리칠 수 있다면 주사위를 던질 용기를 낼지도 몰랐다. 첫 시도만 한다면 다음은 쉬울 테니 계속 주사위를 던지게 되리라. 600번을 굴려서 안 되면 6000번을, 60000번 까지도.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여자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래서 굳이 적을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았다. 매 순간 무의미한 공상들을 하느라 행동할 기력을 소진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왜들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욕했던 신인 남배우가 톱스타가 됐을 때도 여자는 그냥 여자였고, 영화관 동료들이 결혼을 하고 유학을 가고 취업을 하는 동안에도 여자는 여전히 여자였다.

  제 주사위를 버려가며 택했던 남자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풍선처럼 배가 늘어져서는 대화라도 할라치면 못 들은 척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여자는 더는 여신이 아니었고 남자도 여자를 추대할 능력이 없었다. 가끔 여자는 영화관 오빠를 생각했다. 부실해진 앞머리숱과 얼굴에 흐르는 유흥 기름 때문에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적어도... 적어도 이런 한심한 남자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남자는 오빠처럼 주사위에서 1이 나올 확률이란 멋진 글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쓸 테니까. 그리고 생각의 끝은 항상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었다.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둘을 저울질을 하고 있다니. 언제나 제자리인 여자에게 그럴 자격도 없는데. 사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이제라도 주사위를 찾는다면 삶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여자는 안온하고 지루한 생에 중독되었기에 그러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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