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티 Sep 17. 2023

버섯과 베리가 반겨주는 핀란드의 숲

짐을 부지런히 풀고 친구와의 스몰토크로 긴장을 풀었다. 초록이 넘실대는 친구네 베란다 앞 식탁에 앉으니 옛 핀란드에서 맡았던 냄새와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너무 그리웠던 이곳의 바깥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설렘이 채 가시질 않는다. 사실 헬싱키에서의 추억은 거의 없다. 투르쿠로 가기 위해 하룻밤 정도 묵은 게 전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핀란드의 공기와 숲은 어디든 동일하다. 숲과 호수의 나라. 친구는 잠깐 숨을 돌리고 아파트 옆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가자 한다.

놀거리가 풍성한 한국에 비해 핀란드는 많이 심심한 나라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상점도 많지 않다. 한국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심심해 보이는 이 나라에서 핀란드인들은 나름 소소한 취미를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숲에서 버섯과 베리를 따는 것이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취미일 수도 있다. 친구네 식탁 위엔 일종의 '버섯 사용 설명서'와 같은 책이 놓여 있다. 친구는 최근에 버섯을 공부하게 됐다며 두꺼운 버섯책을 보여준다. 사랑스러운 버섯 바구니도 구매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숲과 호수의 나라인 걸 새삼 느낀다.
요건 독버섯 같다...

버섯 따기 일정엔 친구의 이웃이 동행했다. 핀란드인인지라 버섯의 종류와 버섯의 군락지를 꿰고 있다. 버섯의 군락지엔 이미 누군가 따간 자욱이 가득하다. 이곳에서도 버섯을 따는 것은 일종의 눈치싸움이다. 버섯이 많이 나는 곳을 점찍어 놓은 후, 버섯이 거의 자랐을 즈음 선점하는 게 승자다. 아쉽지만 이날 버섯은 많지 않았다. 친구의 이웃은 이미 비어진 군락지를 알려줄 뿐이다. 아쉽게도 나는 여기에 다시 올 일이 없다. 그녀의 열정적인 버섯 수업이 나에게 다음의 기회를 만들어 줬으면 좋으련만. 하룻밤 이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친구는 버섯 수업을 열심히 듣는다. 그녀는 다음의 기회가 너무나도 많다.

버섯 전문가를 따라서
사랑스러운 친구의 버섯 바구니
요 버섯이 매우 유명한 버섯이라던데,,, 이름을 까먹었다(핀어는 발음부터 어려워 외우기 쉽지 않다)

버섯보다 눈이 간 건 베리다. 한국에선 비싼데 마음 넓은 핀란드의 숲엔 베리가 도처에 널려있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눈이 번쩍 뜨여 베리를 열심히 땄다. 한 줌 한 줌 열심히 따고 있는데 저 멀리서 친구의 남편이 딸과 강아지와 함께 나타난다. 한 손엔 갈퀴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마법의 도구다. 베리를 쓰윽 긁으니 수많은 베리들이 바구니에 순식간에 담긴다. 손으로 따던 내가 더디게 느껴지지만 옆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친구 남편의 도움으로 바구니엔 베리가 가득 담겼다. 친구네 가족은 내가 베리를 다 땄다고 칭찬을 해준다. 멋쩍은 웃음을 지어본다. 

버섯과 베리, 그리고 아파트 나무에서 딴 푸른 사과

최근에 취미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것 같다. 남들이 다 하는 걸 해보지 않으면 괜히 뒤처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노는 것도 때론 계획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많은 미디어에선 어딘가를 가보라고, 무엇을 소비하라고 끊임없이 내게 요구한다. "필수 코스", "핫플", "국룰"과 같은 단어는 특히 피곤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을 비생산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핀란드의 숲을 거닐며 잠시 해방감을 느낀다. 먹지도 않을 버섯을 따면서도 그냥 이 행위 자체가 좋다. 옆에 친구와 강아지와 무엇보다 나를 안아주는 숲이 있다. 잠시 핸드폰은 가방 저 멀리에 두고 오랜 시간 켜지 않는다. 순간에 집중했던 때가 참 오랜만이라 낯설지만 반갑다. 그 이름 모를 숲에서의 시간이 더디게 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이전 03화 11년 만에 재회한 우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