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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티 Sep 20. 2023

쌀국수와 함께 한 핀란드의 저녁

착착착! 척척척! 친구의 남편이 저녁요리를 시작한다. 육아는 친구와 나의 몫.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친구의 딸과 그림을 그리며 저녁을 기다린다. 해 질 녘 소파에 앉아, 누군가 해주는 저녁을 기다리는 게 얼마만인가. 

아주 어릴 적으로 돌아간다. 약 저녁 6시, 본격적인 저녁으로 돌입할 무렵 항상 방 안에 앉아 만화영화를 시청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부엌에서 지지직 밥이 다 되어간다는 신호가 울린다. 일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는 늘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셨다. 


오랜만에 아무 계획도 없는 저녁 시간을 가져본다. 친구와 사부작거리며 맛있는 저녁을 기다린다. 주방과 거실 사이엔 요리하는 소리와 우리의 웃음이 전부다. 이 집의 힐링, 큰 베란다 저머에는 저물어가는 어둑한 풍경이 전부다. 아무런 인공의 빛이 없다. 그 흔한 24시간 편의점도, 네온사인도 없다. 주변엔 두 동의 아파트와 숲과 우리들만 있을 뿐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저녁을 온전히 느끼며 맛있는 저녁을 기다려본다. 



핀란드에서의 첫 끼는 핀란드의 음식이 아닌 바로 쌀국수였다. 베트남 가족들이 만들어주는 쌀국수라니. 큰 그릇에 숙주와 함께 꽉 찬 국수를 보니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핀란드에 오기 전 독일에 일주일 가량 있었던 터라 국물이 너무 당겼었다. 호로록 찹찹. 국물을 먼저 마셔본다. 한식도 아닌데 쌀국수를 먹으니 정말 살 것 같다. 후다닥 후다닥 너무 빨리 흡입해 버렸나. 아차, 이 부부의 먹는 속도를 배려하지 못했다. 쌀국수에서 고국의 맛을 느끼다니.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던 쌀국수


친구가 어떤 일을 하며 핀란드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는다. 나름 친한 친구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공항에서 일하는 그녀는 무엇보다 영어로 소통하며 일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은행에서 일하는데 그 또한 영어를 주로 활용한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로 꼽히는 핀어로 일하는 환경은 이방인들에게 쉽지 않으리. 다른 나라에 비해 이민자가 많지 않은 이곳에서 삶을 꽃피워가고 있는 이 부부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졸업 후 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간 너무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아 이내 말을 머금는다. 너무나도 짧았던 핀란드의 저녁이 그렇게 저물어 간다. 두 부부의 쌀국수 그릇도 조금씩 비워져 갔다. 


저물어 가는 핀란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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