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이별의 종착지 헬싱키에서
북유럽 특유의 회색 도시 같은 헬싱키. 아침부터 날씨가 좋진 않다. 핀란드에서 해를 잘 본 적이 없는데, 8월에 여행 왔음에도 흐리고 제법 쌀쌀하다. 십여 년 전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들른 곳이 이곳 헬싱키다. 핀란드의 수도. 나에게는 첫 유럽이기도 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유럽에 대한 환상, 아기자기하거나 화려한 모습은 없었다. 제정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어둡고 차가워 보이는 건물들. 파리의 에펠탑, 런던의 빅벤,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유명한 랜드마크 또한 없다. 하지만 파리, 런던, 로마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이 헬싱키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기만 했다. 투르쿠(Turku)로 들어가기 전 그리고 교환학생을 마치고 투르쿠에서 빠져나온 후 각각 하루 정도 머물렀던 이곳. 짧았지만 첫 만남과 이별을 함께 했던 곳이라 나에겐 의미가 꽤 크다.
헬싱키는 여전히 흐린 도시의 공기를 갖고 있었지만, 흐린 공기를 전환시킬 노오란 도서관이 도심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헬싱키 오디(Oddi) 중앙도서관으로, 이젠 헬싱키 관광객이라면 꼭 찾는 관광명소가 되어 버렸다. 오디 중앙도서관은 핀란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약 20여 년 간 추진한 프로젝트라 한다. 핀란드산 전나무로 만들어진 외관이 눈에 띈다. 도서관 내부 콘텐츠도 매우 실용적이다. 10만 권의 책뿐만 아니라 3D프린트, VR, 재봉틀, 스튜디오 등 창작을 위한 공간들이 시민들에게 열려있다. 아이들 서적이 있는 곳엔 작은 실내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으로 놀러 나온 가족들이 인상 깊었다. 가장 놀러 왔던 건 화장실. 남녀 성별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는 성별 선택에 주체성을 가질 수 있게 고안되었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빠져나오자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헬싱키의 상징인 노란색과 녹색이 뒤섞인 트램을 타고 마켓광장으로 향했다. 발트해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요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몰려 있다. 이전에 이곳에서 첫 청어를 접했을 때, 너무나도 짜서 얼마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좀 다를까? 가장 손님이 많아 보이는 노점상을 찾아 청어를 포함한 생선요리와 연어수프 두 접시를 주문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첫 숟가락을 떠본 연어수프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이후로 핀란드의 여러 레스토랑을 갔지만, 노점상에서 먹은 연어수프는 우리에게 부동의 소울푸드였다. 따뜻한 연어수프에 짭조름하게 튀겨진 청어는 입맛을 더욱 돋웠다. 아니 청어가 이렇게 맛있었단 말인가. 십여 년 전의 도저히 못 먹겠다며 뱉어버린 청어는 어디로 갔을까. 그간 내 입맛이 변한 건가. 따뜻해진 배를 뒤로하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카페에서 커피로 노곤함을 달랬다.
오후가 되니 말도 안 되게 흐린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햇빛이 조금씩 비추자 우린 바로 헬싱키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헬싱키 대성당으로 향했다. 하늘의 행운이 우리에게 모두 쏟아졌는지, 해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더니 대성장 광장이 환히 밝기 시작했다. 하늘은 파아란 도화지로 변했다. 이렇게 해가 짱짱하고 밝은 헬싱키는 처음이다. 회색도시라는 오명이 억울하다는 듯이 푸른 하늘과 흰 대성당의 조화를 아름답게 만들어 버렸다. 저 멀리 보이는 발트해와 유람선, 그리고 마켓광장은 여기가 바로 헬싱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구름이 걷힌 헬싱키를 한 동안 즐겼다. 우리의 인생에도 구름이 있다면 슬금슬금 걷히길 바라며. 오늘 마주한 햇빛이 지속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