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만에 학생 쉐어아파트와 학교를 거닐다
십여 년 전 머물렀던 장소들을 다시 찾아가 본다. 찰나지만 찬란했던 나의 청춘이 깃든 곳. 오랫동안 기억 속에만 머물렀던 그곳을, 현재라는 시간을 발 딛고 마주해야 한다니 설레면서도 두렵다. 내 기억 속에 소중하게 머물러 있었던 장소들이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다면 얼마나 슬플까. 오랜 기간 동안 왜곡된 기억을 갖고 살았다면 그 보다 슬픈 일이 없을 것이다. 조심스레 포장된 기억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는 날이다.
먹고, 자고, 쉬고 나의 삶이 담겼던 학생 기숙사 겸 쉐어어아파트로 먼저 향했다. 투르쿠 시내에서 차를 타고 20여분 간 달려가면 널따란 땅에 외로이 서있던 쉐어아파트. 주위에 있는 거라곤 마트와 숲.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도 인생이 흘러갔고, 추억이 하나 둘 만들어져 갔다. 함께 방을 썼던 스페인 룸메 베아와 러시아 룸메 어텀은 이곳에 더 이상 없다. 세월이 지나 이곳을 방문하니내 청춘 속 함께했던 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겨우겨우 기억을 더듬어야 생각나기도 한다. 내 인생의 길에서 찰나의 순간 함께 걸었던 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들은 작았던 아시안 소녀를 기억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 무렵 세월이 무색하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아파트를 보니 고맙게 느껴진다. 손으로 밀어야 열리는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도 여전하다. 다. 당시엔 느끼지 못했던 이 아파트가 지금 보니 매우 허름해 보인다. 안쓰럽다.
학교에서의 기억은 점심시간이 거의 8할을 차지한다. 물가가 비싼 핀란드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렴했던 학생식당에서 점심으로 배를 든든히 채워야 했다. 그땐 왜 이렇게 밥에 집착했는지... 거의 필사적으로 학생식당 밥을 사수했던 것 같다. 학교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학생 식당에서 풍기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다. 이 학생식당 냄새는 시간이 지나도 똑같다. 십여 년 전처럼 학생 식당 앞에서 줄을 서본다. 이젠 주문이 자동화되어 한참을 헤맸다. 키오스크의 메뉴가 복잡해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몰라 결국엔 서 있던 학생에게 물어본다. 이전처럼 학생 할인으로 먹을 수 없고, 일반인의 가격을 지불한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다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기쁘다. 늘 필수 사이드 메뉴로 있었던 핀란드 비스킷과 버터는 그대로다. 특히 샐러드와 곁들인 샐러드 소스의 맛은 놀랍도록 그대로다. 아시아 여자 다섯 명이 미친 듯이 설레하며 점심을 먹는 모습을 학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십여 년 전 이곳에서 공부했던 학생이라고 말하면 이들은 믿을까. 나도 지금이 믿기지 않는다.
다행히도 나의 오랜 기억 속에 머물렀던 이곳들을 현실이라는 렌즈를 끼고 바라보았도 그대로였다. 나는 어느덧 30대 중반에 가까워지고 있고, 세상의 때를 제대로 묻었지만 이곳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 모습 그대로 기다려줬다. 덕분에 찰나의 추억을 소환하여 십여 년 전의 나를 재현할 수 있었다.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 내 안의 순수함과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직 살아있었구나. 꽁꽁 묻혀 잘 보이지 않았던 청춘의 씨앗들이 이곳에서 슬금슬검 올라오려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해도 고개를 들어 올린 청춘의 씨앗이 자취를 감추지 않도록 잘 가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