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 시절 핀란드에 처음 갔을 때 백야가 한창이던 8월이었다. 기나긴 낮과 함께하는 푸르른 여름. 핀란드 사람들은 모두 제2의 집인 호숫가의 별장으로 향한다. “봄이 오면 우리 페테르부르크의 자연은 갑자기 자신의 모든 위용과 하늘이 내려준 모든 재능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작가가 표현한 위의 문장에서 ‘봄’을 ‘여름’으로 바꿔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핀란드 사람들은 해가 뜨지 않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이 찰나의 여름을, 찰나의 햇빛을, 찰나의 자연을 여름 동안 미친 듯이 즐긴다. 여름 별장으로 모두가 떠난 도시는 썰렁해진다. 책의 배경인 페테르부르크의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보내러 다차로 떠났을 때 느꼈던 주인공의 쓸쓸한 감정의 묘사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온” 페테르부르크가 다차로 떠났다고 묘사했다.
외롭고 쓸쓸한 거리의 몽상가 앞에 나스텐카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항상 몽상을 하며 살았던 그에게는 사랑 또한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지 모른다. 상상 속에서의 사랑은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없어서 어쩌면 편했을 수도 있다. 처음엔 나스텐카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그녀에게 호감이 생기고 점점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는 고민하다 정말 용기를 내 고백하고, 그녀 또한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스텐카가 오랜 시간 기다린 약혼자가 나타나자 그들이 꿈꾼 미래는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몽상가는 모욕감과 슬픔을 느끼지만 그때야말로 몽상이 아닌 진짜 사랑을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여름밤의 백야처럼 찰나의 사랑일지라도 사랑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몽상가는 망설이고, 용기내고, 행복을 느끼고, 쓰라린 아픔을 느끼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어떤 성장을 이뤘을까? 마지막에 나스텐카를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보내주는 것을 보며 26세의 순수한 몽상가에게, 그리고 그 시절의 나에게 응원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백야’가 그가 초기에 가졌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을 나타낸다는 해설을 보았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공상적 사회주의를 기나긴 겨울이 찾아오면 사라질 한 순간의 백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후기에 실천을 강조하는 기독교 사상을 강조하게 되는데, ‘백야’ 속 나스텐카처럼 한 여름의 밤의 감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단편집을 시작으로 도스트예프스키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백야’에서의 사랑은 아쉽고 씁쓸했지만, 문장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멋진 밤이었다. 그렇게 멋진 밤은, 오직 젊은 시절에나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젊은 시절 보았던 백야의 밤이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p.115 멋진 밤이었다. 그렇게 멋진 밤은, 친애하는 독자여, 오직 젊은 시절에나 만날 수 있는 법이다.
p.121 자연은 도시의 벽에 둘러싸여 질식할 것만 같던 나를, 병자나 다름없는 도시인인 나의 마음을 그토록 강렬하게 뒤흔들어놓은 것이다.
봄이 오면 우리 페테르부르크의 자연은 갑자기 자신의 모든 위용과 하늘이 내려준 모든 재능을 남김없이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