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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Nov 02. 2020

011

유골함 속의 흙


“아빠는 엄마 옆에 묻히고 싶다. 이 자리가, 할머니가 사두신 자리이니 아빠는 여기로 올게.”

이번 설날, 친할머니 산소 앞에서 아빠의 이렇게 말했다. 친할머니와 둘 뿐이었던 어린 시절을 겪으며 아빠는 본인의 엄마를 늘 큰 위인으로 생각했다. 그럼 올해 안으로 태상이 묘를 정리해서 엄마 봉안담 옆 자리에 두자. 태상이 묘도, 아빠 있을 때 정리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빠 입에서 들은 '태상'이란 이름이 무척 낯설었다. 이태상은 나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나의 오빠 이름이다. 나는 둘째 딸로, 내 위로 다섯 살 차이의 언니가 있고, 연년생인 남동생이 있다. 삼 남매로 자랐지만, 나의 엄마는 네 번의 출산을 했다. 내가 태어난 해, 나보다 3살 많았던 오빠가, 여름휴가 가던 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 엄마와 삼촌 묘에 갔다가 근처 5분 거리의 다른 묘지에 들러 언니가 그곳에 갈 때 꼭 ABC 초콜릿과 동물 쿠키를 가져갔던 것은 기억난다. 묘 주변에 초콜릿과 과자를 뿌려주고, 잠시 기도하고 난 뒤에는 늘 엄마가 울고 있었기에, 나는 그 묘를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훗날 그 묘가 오빠의 묘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오빠의 묘는 친할머니 묘소 아랫단에 있는 묘였기에, 설날이나 추석 등에 할머니에게 갈 때면 오빠에게도 찾아갔다. 늘 엄마는 할머니 산소에서 차례 지낼 음식을 챙기고, 조화나 생화의 꽃을 늘 두 개를 만들었다. 난 84년 3월에 태어났고, 오빠는 84년 8월에 돌아갔으니, 5개월의 시간이 겹치지만 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언젠가 사진첩에서 분명 언니와 남동생인데, 사진 아래 적힌 연도를 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이여서, “아니 진수가 왜 이때 여기 있어요?”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남동생과 똑같은 얼굴인데, 알고 보니 그게 오빠라는 것을 안 것도 한참 뒤였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불효자라, 예전에는 화장을 하고 말았다는데, 당시 아빠는 도무지 그럴 수 없어서 오동나무관에 아들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여름날, 엄마의 오빠들인 삼촌들과 평생 외동으로 큰 아빠가, 함께 여름휴가를 가던 길. 아빠는 재차 고속도로를 이용하자고 했지만, 삼촌들이 국도를 이용하자고 해서 국도로 가다가, 순식간에 났다는 사고. 아빠는 종종 그 순간이 너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는데, 난 엄마에겐 차마 묻지 못했다. 지금은 엄마도 돌아가셨기에, 그 상황은 영영 물어볼 수 없이, 아빠의 말로서만 재구성이 된다.  엄마의 삶에 있어서 그 죽음은 너무나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친할머니의 친정식구들에 대한 비난도 물론 더해졌을 것 같다.

오빠의 묘를 정리해 엄마 옆으로 옮기자고 이야기를 한 뒤로 36년 전 그 죽음이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친할머니 산소 아래 모신 오빠의 산소는 올 추석을 마지막 성묘로 생각하고, 올해 안 묘를 정리해 납골당에 모시려고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서류 등을 접수했다. 올해가 윤달이 있어서 유독 묘를 정리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묘를 정리하는 것을 개장(改葬)이라 하고, 개장 신고서도 필요하다는 것도, 유골을 모아 화장장에 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돌아가신 분이 워낙 어렸고, 또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지났으면, 사실 유골이 더 이상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럴 경우엔 묘의 흙을 모아서, 유골함에 넣어 봉안담에 모시기도 합니다.” 장례지도사와의 통화에선 이런 점을 알게 됐다.

장례지도사는 묘지 관리소에 오빠의 이름으로 제적등본을 떼어, 사망일시가 적힌 서류를 꼭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가족인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 한번 부른 기억이 없는 오빠를 국가의 서류로 남아있다는 건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성당에서 관리하는 묘원이기에 며칠 전 그 성당 사무실에 서류와 도장 등을 챙겨갔고, 서류 접수 후 파주의 묘원으로 서류를 보냈다. “유골을 모아서, 화장을 한 뒤에 납골당으로 가셔야 해요. 개장 유골 화장이 따로 있으니 홈페이지에서 가능한 때 예약하면 돼요. 근데 예약이 쉽지 않을 거니 매일 밤 12시, 딱 그 날이 바뀔 때 들어가 보세요.”라는 말을 들으니, 유골 화장을 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예약을 해야 하고, 그 예약이 이렇게 치열하다는 것에  무척 놀랐다.
(아직도 예약 못했다. 11월 안으론 하고 싶고, 위령 성월에 하고 싶은데.)


엄마와 유독 친한 딸이었던 나는, 어쩌면 나의 무의식 안에 엄마가 더 이상 울지 않길 바라며 살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도 감정이입을 잘하는 나는 때때로   남동생이 내가 낳은 아들처럼, 늘 돌봐야 하는 존재로 느끼고 있다는 것도 훗날 감정을 살피고, 돌보며 알게 됐다.


 자식을 잃고 처절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또 다른 아들인) 동생을 보낸 건 아닐까, 도 생각한다.


오빠와 엄마는 이미 만났겠지만, 곧 봉안담에 같이 모셔질 것이다. 부부단을 계약했는데 현재 비어있는 엄마의 옆은, 어쩜 자식들 중 가장 짧은 시간 엄마와 머물렀던 이가 그 자리에 있게 되니, 인생은 어찌 보면 또 공평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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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위령의 날 정리하고 완성하고 싶었던 글인데 결국 부족하지만 오늘 올려본다. 11월 안에 다시 퇴고해서 보다 나은 글로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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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았던 시간, 감당할 수 없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죽은 후, 묘를 개장하고 화장하는 것 등등. 정말 한 줌으로 죽는다는 것을 이 위령 성월에 다시 체험하게 된다.


오빠가 있던 삶을 어땠을까? 가끔 궁금하다. 이 요셉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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