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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3.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10

은주야, 듣고 있니?



라오반이 어머니에게, 싼웬에서 사과농장을 하는 ‘루챵(魯强)’이라는 중국인 남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처음 말한 날은 2월 29일이다.


라오반이 어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생각해봐요.’라는 뜻으로 “카오뤼, 카오뤼.”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일없슴다.’라는 뜻으로 “메이 씌, 메이 씌.”라고 말하며 고사하였다.

‘카오뤼’와 ‘메이 씌’를 반복하며 한 달 반이 지난 가운데 드디어 올해의 야시장이 시작되었다.


지난 가을까진 작은 손전등 하나로 베개포의 자수며 바느질을 비추고 돈도 확인했었는데, 야심차게 큰 손전등을 하나 마련했다.

내가 작은 손전등으로 손님들이 내미는 돈을 비추고, 어머니가 큰 손전등으로 베개포와 머리장식들을 비추기로 했다.

작은 바구니도 두 개 사서 핀과 고무줄을 따로 담아 놓았고 손님들이 비춰볼 수 있게 손거울도 가지고 갔다. 


나는 어머니가 만든 것 중에 하얀 물방울무늬가 있는 하늘색 끈을 골라 머리를 묶고, 잔머리도 없는데 양쪽 귀 옆으로 연보라색과 흰색 구슬이 쪼르르 이어진 핀도 하나씩 꽂았다.

새봄이라 그런지 베개포가 30장도 넘게 팔렸다.

당시엔 ‘셩즈(고무줄)’나 ‘쩌거(이것)’라고 지칭했던 하늘색 ‘곱창밴드’도 열한 개나 나갔고, 색깔이 다른 구슬핀도 한 쌍씩 두 사람이 사 갔다.


첫날 성과에 대만족하면서 머리장식들을 정리하고 베개포도 막 거두려던 참에, 구경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짧은 머리, 둥근 갈색 얼굴, 린화 억양이 많이 들어간 말투.


물건을 사러 와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나에게 몇 살이냐고, 린화 억양이 아닌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내 얼굴을 보고는 말없이 빙긋 웃더니, 네 가지 자수를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모두 같은 가격이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약간 경직된 말투로 가격을 알려주었다.

그는 자수별로 두 장씩 총 여덟 장을 샀다.

일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색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



열흘 후 화요일, 그가 라오반과 함께 식당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가 사과농장을 하는 ‘루챵’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가게 문을 일찍 닫는 화요일에 시간 맞춰 그들이 왔다. 안쪽에 어머니와 주인아주머니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루챵과 라오반이 나란히 앉았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그들의 테이블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예의. 미안. 좋은 친구. 작년. 종종. 자전거. 칭다오. 딸. 이혼. 린화. 사과농장. 노인들. 사정 얘기. 소학교. 천천히.

이런 단어들이 들렸다.


그날 이후 루챵은 어머니와 내 앞에 자주 등장했다.

좋은 건 그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사과를 상자째 집으로 가져온 것이고, 나쁜 건 늘 함께였던 어머니와 내가 가끔씩 떨어져 있는 때가 생기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시간들이 모여 여름이 되었다.



어느 저녁 어머니와 나는 식당 일을 마친 후 집으로 가는 대신 노점에 들러, 구운 만토를 하나씩 사 먹고 전화 가판대로 갔다.

그 무렵 어머니는 전화하는 횟수가 늘어, 그날도 수화기를 들자마자 “박희옥임다. 소식은 좀 있슴까?”로 시작하였다.


꽤 길게 통화를 한 어머니는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식당 앞에 세워둔 자전거까지 걸어가면서 어머니는 침묵했다.

어머니는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어 앞자리에 앉고 나는 뒷자리에 앉아 어머니 등에 기댔다.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앞자리까지 들리도록 소리 높여 물었다.

아무 소식이 없는 검까아…… 내한테 말을 못 해주는 검까아……


이윽고 한숨처럼 천천히 쏟아내는 어머니의 말들이 뒷자리까지 들려왔다.

둘 다다아……


집에 도착해 씻고 앉아있다가 우린 이불속에 들어가 누웠다.

내가 글씨가 써지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도 바느질이 해지지 않았나 보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내게 말했다.     


나의 계획, 그러니까 ‘살 궁리’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들은,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틀어지기 시작했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현실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건 너의 안전이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것이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믿는 것뿐이라니. 이토록 무능한 것이 미안하고 사무친다.     

......

“은주야. 듣고 있니?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절대 잊으면 아니 된다.”


싼웬에 도착한 날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물은 이후 어머니가 나를 ‘은주’라고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다.

듣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어둠 속에서 어머니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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