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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3.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11

소식은 없음까?



가방 안에는 어머니의 전 재산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바들바들 떨었던 것은 액수 때문이 아니다. 내가 실감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100위안짜리 지폐 30장은 어머니가 몇 겹으로 튼튼하게 만든 지갑 안에 들어있었고, 그 지갑은 가방 안쪽에 덧대어 꿰매버린 작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다.


가슴이 벌렁거려 밥도 삼키지 못한 것은 가방 속 돈이 아닌, 바지 주머니 안 기차표 때문이었다.

나는 1년 전에 된장찌개를 먹었던 기차역 광장의 ‘린화 조선족 식당’에서, 루챵과 함께 ‘결혼증’을 신청하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간밤에 어머니가 한 말들을 되새겼다.     



오후 다섯 시 반까지 내가 식당에 돌아오지 않으면 기차역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너를 기차 좌석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자세한 내막은 하나도 모르니 무슨 말을 물어도 곧이곧대로 대답해선 안 된다.

너는 조선족 중국인이고, 연변자치주 북동쪽 산골짜기 용석골에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중 일은 나중이고 최소한 내일 기차 출발 전까진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네 좌석은 침대칸 제일 윗자리다. 주인아주머니가 같은 칸 사람들에겐 대충 사정 설명을 해줄 테니, 너는 기차에 타자마자 좌석에 올라가 누워있어라.

최대한 아무와도 말하지 말되, 검표원이 묻거나 어쩔 수 없이 꼭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옌지역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라.

옌지에서 내려라. 장사장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일 저녁에 내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모레 저녁 기차역으로 나오기로 했다. 옌지에 도착해서 장사장님을 만나면 그 후엔 장사장님 말을 따르라.

쥐어짜서 내 머리에서 나온 방법은 이것뿐이다.     



깊은 밤까지 어머니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고, 날이 밝자 얼음강물 위를 건너오기 직전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오전에 나를 여기 두고 식당 문을 나서기 직전에도 어머니는 다시 한번 내 조그만 몸을 힘껏 감싸 안았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조선말로 “아즈마이가 혼인하러 가는 길이 싫은가?”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루챵도 지켜보다 “그러지 말고 메이란도 같이 가요.”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에요.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번거로울 거예요.”라고 단호히 말하고 문을 나섰다.


훗날 어머니는 이날을 회상하며 ‘그것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치밀한 작전’들이 다 무엇이었는지, 당시의 나로선 전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오직 생생히 실감 나는 건, 어쩌면 어머니와도 헤어져야 할지 모르는 아득한 공포.     



*



오후 다섯 시 십구 분, 식당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걸어 들어오는 그림자는 다행히도 어머니와 루챵이었다.

아침에 타고 온 루챵의 검은색 차가 골목길에 서 있었다. 루챵이 직접 운전했고, 어머니와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승용차를 탔던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아침에 나는 긴장해있었다. 기껏해야 ‘빵차’와 버스밖에 타본 적 없던 나는 승용차가 너무 편안해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가방에서 결혼증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아니다, 이건 잘못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결혼증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머니와 루챵이 함께 찍은 사진과 선명한 글자... 魯强(루챵), 朴喜玉(퍄오시위)


루챵이 나에게 저녁을 사준 후 데려다주겠다고 말했지만, 어머니가 3일 후에 먹어도 충분하다는 말로 만류했다. 루챵은 어머니와 나를 집 앞에 내려주고 갔다.

그의 종용에도 우리는 아직 그의 집으로 옮겨가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가 ‘증’을 만들고 난 후 옮기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다시 한번 나를 아주 오랫동안 꽉 껴안았다. 그제야 얼음장 같던 내 몸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무 문제 없었다. 아직 괜찮았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곤 자전거를 타고 시장 입구의 전화 가판대로 가 장만승에게 전화를 걸어서도 똑같이 말했다.

아무 문제 없었다고, 아직 괜찮았다고. 근심시켰다고, 고맙다고. 그리곤 덧붙였다.

소식은 없슴까?



소식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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