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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3.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12

안전한 신분으로



3일 동안 우린 싼웬 시장의 가게들을 천천히 구경하면서 옷을 두 벌씩 사고 신발도 샀다.

루챵이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거듭 말했지만 수저세트가 여덟 벌씩 들어있는 선물함 두 개를 샀다.

숟가락은 하얀색 도톰한 사기로 만들어진 것이고 젓가락은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문양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 밖에 별다른 짐 없이, 우리는 사과농장 입구에 있는 루챵의 붉은 벽돌집으로 들어갔다.

모든 중국의 집에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의 집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과 부엌 바닥은 평평하고 차가운 하얀 돌, 대리석이었다.

마당이 내다보이는 큰 창문에는 미색 커튼.

등받이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는 나무 의자는 마치 조각품처럼 보였고, 위에 네모난 빨간 방석이 세 개 놓여있었다.

그 옆엔 같은 모양이지만 1인용인 나무 의자. 그 위엔 같은 모양의 빨간 방석.

바닥에는 붉은 실로 수놓아진 커다란 검정색 양탄자. 그 위에 나지막한 나무 테이블.

맞은편 벽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 서랍장. 그 위에는 두 단으로 쌓은 사과상자만한 텔레비젼.


처음 보는 ‘부잣집’ 모습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이 쳐졌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몸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내 방’에는 나무 침대와 작은 서랍장,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

창문 밖으론 마당이 보이고 커튼은 연노랑 색이었다. 바닥은 내가 좋아하는 마루였다.

침대 위에 놓인 이불은 빨간색이었는데, 빨간색은 나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색이라고 루챵은 말했다.

베개도 빨간색이었는데 그 위에 야시장에서 산 우리의 하얀 무명 베개포가 얹어져 있었다.

루챵은 나를 내려다보며 뭔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어머니 뒤로 숨고 말았다.

이 화려하고 포근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베개포와 나, 둘 뿐인 것 같았다.



‘어머니와 루창의 방’은 내 방을 대여섯 개 합친 것만큼 크고 침대도 거대했다.

이불과 베개는 역시 빨간색이었는데 테두리에 황금색 실로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우리에게 산 베개포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잘 개어져 있었다.


안쪽 벽에는 서랍 달린 긴 옷장이 서 있었고, 그 앞에 둥근 테이블과 고급스러운 원목 흔들의자, 폭신한 1인용 가죽 소파도 둘 있었다.

방문 쪽 벽에는 축구공 모양의 열쇠고리, 황금 호루라기, 운동화 모형 등 기념품으로 가득한 장식장도 있었다.

집 안팎 곳곳에 구경할 것들이 끝도 없었다.


부엌엔 화로가 아닌 ‘가스레인지’가 있었는데, 옌지와 싼웬 식당의 주방에 있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반짝였다.

무엇보다 '불꽃'이 크고 시뻘건 색이 아니라 작고 투명한 보라색인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주저하며 시장에서 산 수저세트 선물함을 부엌의 테이블 위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선물함을 열어본 루챵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이참, 아무것도 사지 말랬는데두……”라며, 어머니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의 표정은 온화했다. 우리를 보러 야시장에 처음 왔던 날,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



다음 날 점심 무렵 이웃집에 사는 루챵의 부모님이 집으로 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그 다음 날 아침엔 칭다오(靑島)에 사는 여동생 루홍(魯紅)이 왔다.

그날 점심, 루챵은 근처 큰 식당이 가득 차도록 손님들을 불러서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나를 새로운 가족이라고 소개했다.

싼웬 식당의 주인아주머니와 라오반도 왔다. 루챵과 라오반은 눈만 마주치면 ‘깐베이’라고 외치며 옌타이고량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해 늦여름, 나는 어머니의 바람처럼 ‘안전한 신분’으로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나는 루챵과 관련 있는 게 틀림없는, 그러나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더 이상 박미란(朴美蘭)도 루메이란(魯美蘭)도 아닌 ‘루-샤오-옌’ 즉, 노소연(魯小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생년월일도 전혀 다르게 적어야 했다.


어려웠지만, 점차 혼자만의 공간과 어머니 없이 잠드는 시간에 익숙해져 갔고, 샤오옌이라는 새 이름과 낯선 존재들(이를테면, 중국인 조부모와 고모), 그들이 알려주는 중국식 예절들, 학교생활, 선생님, 학우들, 그들과의 대화, 중국어 표준어와 산둥 억양, 린화 사투리, 그리고 코가 아닌 혀로 접하기 시작한 본격적인 중국 음식들.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더 많은 것들이 매일 휘몰아치며 내 일상에 정착해갔다.


어머니는 더 이상 식당에 나가지 않았고, 베개포도 만들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지만 새 이름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메이란’이었을 적에 어머니가 나를 ‘미란’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샤오옌’이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조선발음인 ‘소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한 번, 내가 ‘샤오옌’을 조선식 한자음으로 어떻게 읽고 쓰는지 물었을 때, ‘소연’이라고 가르쳐주면서, ‘련꽃’은 ‘련’이지만 ‘제비’는 ‘연’으로 쓴다고 말했던 때를 제외하고.


한동안 어머니는 조선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 나를 ‘샤오옌’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미란’이라는 이름이 내 삶에서 그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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