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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3.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13

아버지가 중국 가서 계란지짐 사줄게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산둥 억양이 아닌 내 말투를 듣고 소수민족이냐며 신기해했지만,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난 말수가 적은 얌전한 아이가 되어갔다.


루챵은 덩치가 크고 반들거리는 둥근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었지만, 그가 종종 하는 말로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음식 솜씨도 좋아 돼지고기나 닭고기에 갖가지 채소를 넣어 볶는 면 요리와 감자채볶음을 자주 해주었다.


가끔 나에게 초콜릿을 사주었는데, 어쩌다 린화 시내에 다녀올 때면 포장지에 알파벳이 쓰여있는 미제 초콜릿을 사와 어머니 몰래 주곤했다.

그의 말로 ‘비싸서’ 그렇다는데, 그가 쓰는 돈은 어차피 그의 돈으로, 어머니 눈치를 보는 척하는 것이 그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루챵은 어색하더라도 자기를 ‘디에(爹)’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디에는 산둥 린화 사람들이 ‘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나는 내 아버지도 ‘아빠’라는 간지러운 말로는 불러본 적이 없다.

망설인 끝에 ‘아버지’라는 뜻의 ‘푸친(父親)’이라 부르겠다고 말하자 루챵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샤오옌, 우리가 아무리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 말은 너무 예의를 차리니까 그냥 쉬운 단어로 불러 주지 않을래?”


그리곤 내가 무안할까 봐 바로 이어서 “그렇게 어려운 단어는 어떻게 알았어? 샤오옌 일곱 살 맞아?”라며 나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렇지만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루챵을 ‘디에’라고 부르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루챵과 둘이서만 시장에 갔던 날이 떠오른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그가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주고 나서 “샤오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라고 물었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게 여긴 루챵이 나를 들어 올려 안더니 “샤오옌이 먹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디에한테 말을 못 하고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린 것이다.

루챵도 당황했지만 나도 당황했다.

“왜 그러니, 괜찮아? 먹고 싶은 거 없으면 말 안 해도 돼.”


그는 내 마른 등을 톡톡 두드렸다.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그의 목에 매달려 '뚜이-부-치(미안해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어색하게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방에 앉아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들어와서 시장에서 왜 울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뾰루뚱하게, 모르겠다고 중국어로 대답했다.



시장에서 루챵이 내게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을 때, 사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어딘지 기울어져 보이는 백강 우리집 툇마루에 앉아, 밤하늘에 별을 올려다보며 아버지가 말했었다.


“은주야. 중국에 가면 계란지짐이 있는데, 요만한 지짐에 계란 한 개가 온전히 다 들어간다.

나중에 아버지가 중국 가서 계란지짐 사줄게.”


아버지는 ‘요만한’이라고 말할 때 오른쪽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들어 내게 내밀어 보여줬었다.


싼웬 시장에는 아버지가 ‘요만하다’고 말한 크기의 계란지짐이 두 종류 있었다.

하나는 밀가루를 둥글게 부쳐서 그 위에 계란을 터트려 지지면서 파와 양념을 뿌려 둘둘 마는 ‘졘빙’이고, 다른 하나는 밀가루를 겹쳐서 지진 후 그 안에 계란물을 집어넣어 익힌 다음 상추 한 장을 깔고 양념을 발라 절반으로 접어주는 ‘지단관빙’이다.


나는 아버지가 말한 계란지짐이 졘빙과 지단관빙 중에 무엇인지 몰라서 속상했다.

시장을 나란히 구경하고 나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묻는 게 아버지가 아니라 루챵인 것이 서러웠다.

루챵과 아버지에게 너무도 화가 나 저녁도 얼마 먹지 못한 채 밤새 배앓이를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의 정체가 슬픔이라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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